時事論壇/橫設竪設

[횡설수설/이진]시한부 상사병

바람아님 2016. 4. 1. 09:27

동아일보 2016-03-31 03:00:00


“이리 오너라 업고 놀자, 이리 오너라 업고 놀자.” 춘향가 중 사랑가의 한 대목이다. 단옷날 광한루에서 이몽룡은 성춘향을 보는 순간 마음을 빼앗긴다. 과거 준비에 촌음이 아까웠건만 글은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춘향도 원님의 자제 몽룡을 본 순간 한눈에 반한다. 오붓하게 만난 두 사람, 건넛방 월매도 아랑곳 않은 채 세상없을 사랑놀이에 빠져든다. 지금 선남선녀들은 봄바람만 불어도 ‘심쿵’하는 세대. 단옷날까지 기다릴 필요도 없다.

▷‘술은 입으로 들어오고 사랑은 눈으로 다가오지 … 잔 들어 그대 얼굴 보다 한숨짓네.’ 문호 윌리엄 예이츠의 시(‘A Drinking Song’)처럼 이룰 수 없는 사랑은 술을 부르고 상심(傷心)하게 한다. 정보기술(IT) 덕분에 지구 반대편의 연인이 바로 곁에 있는 듯한 요즘도 사정은 다르지 않다. 고무신 거꾸로 신은 애인을 잊지 못해 한숨과 눈물의 무기력을 넘어 끔찍한 일을 저지르는 일은 인류가 존재하는 한 결코 없어지지 않을 것이다.

▷그제 이집트 여객기를 납치한 ‘자칭’ 자살폭탄 테러범은 헤어진 아내를 만나기 위해 일을 벌인 듯하다. 테러범은 아이를 5명이나 두었다니 아내와 금실이 무척 좋았나 보다. 왜 갈라섰는지 몰라도 얼마나 속이 타고 답답했기에 여객기를 통째로 가로채 아내에게 날아갔을까. 익살스러운 미소를 짓는 영국인 인질이 가짜 폭탄조끼 두른 테러범과 찍은 기념사진은 상사병이 아니었다면 볼 수 없었을 희비극이다.

▷4·13총선을 향해 뛰는 국회의원 후보 942명은 잠자리에 누워도 유권자들 얼굴만 아른거린다. “(표만 주시면) 하늘에서 별을 따 드리겠다”는 달콤한 말을 입술에 침도 바르지 않고 천 번 만 번 약속하며 다닐 때다. 사랑이 얼마나 넘치면 일자리를 1100만 개나 만들겠다고 할까. 전에 없던 청년사랑이 듬뿍 생겨나 그러려니 여기는 건 착각이다. 유권자를 무서워하는 체하며 포퓰리즘 공약을 내건 후보들은 속으로 투표일만 지나가길 바란다. 모두 총선만 끝나면 언제 그랬냐 싶게 애정이 홀연 사라질 ‘시한부 상사병’ 환자들이다.
 
이진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