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당 7차 대회를 앞둔 지난 3월15일 김정은 노동당 위원장이 “핵공격 능력의 믿음성을 보다 높이기 위해 빠른 시일 안에 핵탄두 폭발시험과 핵탄두 장착이 가능한 탄도 로켓 시험발사를 단행할 것”이라고 지시한 지 반년만이다.
지난해 8월 북한 지뢰도발 당시 비무장지대를 순찰하는 수색대원들. 국방부 |
하지만 성동격서 전략에 능한 북한이 휴전선 일대에서 국지도발을 감행하거나 한반도를 겨냥한 탄도미사일을 발사하는 등 추가 도발을 실시할 가능성도 있다. 리용호 북한 외무상은 15일(현지시간) 베네수엘라 마르가리타 섬 포르라마르 시에서 열린제17차 비동맹운동 각료회의 연설을 통해 “북한은 전략폭격기를 한반도 상공에 투입한 미국의 도발에 맞서 다른 공격을 개시할 준비가 돼 있다”고 밝혔다.
사격훈련중인 K-9 자주포. 육군 |
북한은 지난 1월 4차 핵실험 직후 핵 능력 강화에 본격적으로 착수했다. 핵탄두라고 주장하는 둥근 모양의 물체를 공개했고, 고체연료 엔진 분사 실험을 실시했으며, 탄도미사일 탄두부에 핵탄두를 탑재한 것으로 추정되는 도면도 공개했다. 김정일 시절에는 ‘전략적 모호성’을 내세워 실제 발사하지 않았던 무수단 중거리 탄도미사일을 시험 발사해 5번의 실패 끝에 성공했다.
무수단 미사일 시험발사는 김정은 체제에서의 북한 핵 전략이 김정일 시절과는 다를 것이라는 신호탄과 다름없다. 김정일 시절 북한은 미국과 협상을 실시하면서 핵실험과 장거리 미사일을 발사하며 대화와 압박을 병행했다. 반면 김정은 체제에서 북한은 협상에 미련을 두는 모습을 보이지 않은 채 실질적인 의미의 핵능력 확보에 총력을 기울이고 있다.
북한 입장에서는 올해와 내년이 사실상의 핵보유국 지위를 굳힐 절호의 기회다. 미국은 오는 11월 대통령 선거로 북한 핵개발을 저지하기 위한 정치적 결단을 내릴 수 없다. 우리나라도 내년부터 본격적인 대선 국면에 접어든다. 북한으로서는 이 기회를 틈타 핵 능력을 급속히 끌어올려 사실상의 핵보유국 지위를 확보해 한·미 차기 정권을 압박할 수단으로 삼을 수 있다. 이 때문에 국제사회의 전방위 압박과 제재에도 불구하고 북한은 대회 테이블로 나서지 않은 채 압박 전략으로 맞서고 있다.
북한 포격도발 1주년을 맞아 훈련을 실시하는 장병들. 육군 |
핵능력 확보에 어느 정도 성공한 북한은 내년 대선을 앞둔 우리나라를 상대로 압박에 나설 가능성이 있다. 핵과 장거리 미사일이 미국의 태도 변화를 촉구하는 수단이라면, 휴전선 일대에서의 국지도발과 단거리 미사일 발사는 내년 대선 이후 집권할 차기 정권의 대북 정책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
한미 군 당국은 북한의 도발에 대해 단호한 입장이다. 군사적 도발을 감행하면 체제가 뿌리째 흔들릴 수 있을 정도의 응징을 하겠다는 것이다. 그러나 북한의 입장에서 한미 군 당국의 대응 수위는 걱정할 상황이 아니다. 핵보유국이 된 이상 한국과 미국이 전면전을 각오하고 군사적 응징을 할 수는 없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북한이 휴전선 일대에서의 국지도발을 머뭇거릴 이유는 없다.
실제로 핵을 보유한 국가에서 국지도발이 빈번하게 발생한 사례가 꽤 있다. 1969년 중국과 러시아는 우수리강과 신장 일대 국경에서 대규모의 무력충돌을 일으켜 핵무기 사용 직전단계까지 갔으나 30여년 간의 외교협상으로 마무리됐다. 협상 과정에서도 크고 작은 충돌이 끊이지 않았으며 양측 모두 수십만 대군을 국경에 집결시켰다.
1990년대 핵실험에 성공한 인도와 파키스탄도 분쟁지역인 카슈미르를 중심으로 무력충돌이 계속 일어나고 있다. 핵보유국으로 평가되는 이스라엘 역시 예방전쟁을 명목으로 레바논과 시리아를 공격하고, 테러리스트를 소탕한다며 가자지구에 수시로 군대를 보내 현지 무장세력과 충돌하고 있다.
북한 역시 핵능력에서 비롯된 자신감을 바탕으로 도발과 협상 제의를 병행하며 핵보유에 기초한 ‘신(新)남북관계’ 구축을 시도할 가능성도 있다.
대북확성기 위장망을 걷고 있는 장병들. 국방부 |
문제는 정부가 북한의 의도를 알면서도 끌려갈 확률이 높다는 데 있다. 북한이 ‘동방의 핵 대국’을 자처하며 한반도 정세를 자기 뜻대로 주도하려 해도 이를 저지할 방법이 없다. 핵보다 더 강한 무기가 없는 현실에서 한반도 정세의 주도권은 북한으로 넘어간 것이나 다름없다.
한반도에서의 무력행사를 금지하는 정전협정과 아직 전환되지 못한 채 미군에 남아있는 전시작전통제권에 발이 묶인 우리 군에 남은 방법은 둑에 구멍이 뚫릴때마다 이를 메우며 둑이 무너지지 않게 하는 식의 임기응변뿐이다. 북한이 자신이 원하는 시기에 원하는 장소에서 국지도발을 감행하면 이를 저지하는 것만이 정부가 취할 수 있는 최선의 대책이라는 것이다. 국민과 국토의 보전이라는 최소한의 목표는 달성할 수 있지만, 반전의 키를 잡지 못한 수동적인 자세로 대응하는 과정에서 군의 피로가 높아질 수밖에 없다.
표적을 향해 포탄을 발사하는 자주포. 육군 |
우리 군은 북한이 무인기로 도발하면 이에 대응할 탐지, 격추 수단을 확보해야 하고 휴전선에서 포격도발을 감행하면 여기에도 대처해야 한다. 결국 돈은 돈대로 쓰고 장병들은 고도의 경계태세로 인한 피로로 지쳐버린 상황에서 국지도발에 완벽히 대처하지도 못하는 현실에 직면하게 된다. 이 과정에서 민첩해야 할 군 조직은 북한의 새로운 위협을 간과하는 악순환에 빠질 위험도 있다.
이처럼 암울한 시나리오를 벗어날 방법이 있을까. 북한이 국제사회의 제재와 압박에도 굴하지 않고 핵능력 확보에 다가가는 지금, 핵 폐기라는 목표 달성이 바람 앞의 촛불처럼 가물거리는 지금, 한반도 정세를 주도하며 북한의 국지도발에 대응할 방법이 있는지 의심스럽다. 반전을 일으킬 회심의 전략도 기대하기 힘든 국가의 보고 싶지 않은 민낯이다.
박수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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