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일보 2017.03.31. 03:10
비가 올 듯 날이 어둡고 바람이 부는 어느 날이었다. 종합병원 택시 승차장에서 노인이 문을 열고 타는데, 온몸이 어그러질 것처럼 위태로웠다. 행선지를 묻고 말한 것 말고는 나도 노인도 말이 없었지만 노인의 날숨에서 병이 깊었을 때의 아버지 냄새가 났다. 문득 아버지 생각이 났다.
아버지는 평생을 써도 못다 쓰실 만큼 힘이 넘치셨지만 어느새 깃든 병에 물 빠진 풍선 같은 몸이 되셨다. 방에만 있게 되면서부터는 꼭두새벽부터 동트는 창을 바라보시다가 아침 볕을 확인한 뒤에야 돌아누우셨다. 일어나 앉기가 힘들어졌을 때도 약만큼은 꼬박꼬박 챙겨 드셨지만 당신에게서 자유로워지려는 몸을 아버지는 끝내 모르셨다.
요즘 아버지 생각을 많이 하면서 나는 새롭게 깨치고 있다. 뙤약볕이 내리쬐는 한낮에 텃밭을 가꾸시고, 눈비가 오는데도 굳이 자전거를 타고 가시며, 사다리 위에서 떨어뜨린 연장을 손수 주우러 내려오면서도 곁에 있는 나를 부르지 않던 아버지를 그때는 이해하지 못했다. 이제 와 아들 둘을 통해 나를 보면 아버지는 때를 놓치지 말고 말보다는 행동을 앞세우며 남의 수고를 끼치지 않는 모범을 보이셨다는 걸 알게 된다.
비가 올 듯 날이 어둡고 바람이 부는 오래전의 어느 오후였다. 서울대 교정에서 몸통의 한 길 위는 잘리고 밑동도 속을 다 비우고 서 있는 고욤나무를 봤다. 마치 옛 사진에서 본 적이 있는 중절모를 쓴 아버지 같은 형태였다. 몸통에 난 손바닥만 한 구멍에서는 지나가는 바람이 우는 듯한 '흐헝 흐헝' 소리가 났다.
어느덧 내 손등에도 검버섯이 핀 뒤로 비가 올 듯 어둡고 바람이 부는 날이면 이제는 밑동마저 잘리고 한 아름의 그루터기로 남은 그 중절모를 쓴 고욤나무를 떠올린다. 아버지가 그리워지는 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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