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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주향의 그림으로 읽는 철학](1) 반 에이크 ‘수태고지’

바람아님 2017. 5. 9. 22:20

(경향신문 2011.01.02 이주향 | 수원대 교수·철학)


ㆍ“어서 오너라, 은총을 받은 이여!” 


모두들 숨이 멎는 것 같다고 표현했던 그림이 있습니다. 

워싱턴 국립미술관의 심장인 저 그림, 바로 반 에이크(Van Eyck)의 ‘수태고지’입니다. 

많은 수태고지가 있으나 에이크의 수태고지가 빛나는 것은 천사와 마리아의 눈높이 때문입니다. 

눈높이가 그들 관계의 온화함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온화한 미소를 짓고 있는 천사는 대천사 가브리엘입니다. 

가브리엘이 입고 있는 저 화려하고 화사한 옷, 한 번 만져보고 싶지요? 

무지갯빛으로 빛나는 날개까지 저 섬세한 옷은 권력과 권위의 상징이라기보다 영광의 상징으로 보입니다. 

그러니까 저 옷은 결핍도, 자만도 없이 충만한 존재의 외화(外華)입니다. 

우리 속의 수호천사가 바로 저런 모습 아닐까요? 


얀 반 에이크, ‘수태고지’, 1425~30년, 나무 위에 유채, 93×37㎝, 워싱턴 국립미술관 소장,

얀 반 에이크, ‘수태고지’, 1425~30년, 나무 위에 유채, 93×37㎝, 

워싱턴 국립미술관 소장,


그 천사가 마리아를 향해 풀어놓은 말은 그림의 일부입니다. 

“아베 그라티아 플레나(AVE GRA(TIA) PLENA).” 

천천히 반복해서 발음해 보십시오. 아베 그라티아 플레나! 

그 뜻이 뭔지 몰라도 따뜻해지는 문장이지요? 대천사에게서 나온 

축복의 말은 이것입니다. 

“어서 오너라, 은총을 받은 이여.”


마리아를 친숙하게 느끼는 미소와 몸짓으로 봐서 

말씀(Logos)을 전하는 천사가 가지고 온 것은 “은총”임이 분명합니다. 

그런데 그 은총의 내용이 뭐지요? 

그 은총이라는 것은 그림의 제목처럼 수태입니다. 분명 수태는 은총이지요?

그런데 상황은 처녀가 아이를 가진 겁니다. 

처녀가 임신했을 때는 돌로 내리치는 나라에서 처녀 마리아의 수태가 

어찌 온전한 은총일 수 있겠습니까?


마리아는 놀랐습니다. 

그 놀람은 일차적으로는 두려움에서 온 것이겠습니다. 

스스로 선택하지도 않은 운명인데 그게 사람들에게 돌을 맞아야 하는 

모멸적인 것이라니요! 

얼마나 두렵고 얼마나 놀랄 일이겠습니까? 


그러나 그림 앞에서 사람들이 숨이 멎는 거 같다고 표현하는 것은 

마리아의 두려움에 공감하기 때문은 아닐 겁니다. 

그림은 바로 그 다음 순간, 두려움이 신비로 변한 순간을 포착하고 있습니다.

마리아의 얼굴을 보십시오.

파란옷의 순수한 그녀는 자기 힘으로 세상을 살아온, 

의지가 굳은 여인의 얼굴입니다. 그런 여인이 뭔가 자신을 완전히 

압도하고도 남을 신비와 환상과 기적을 본 것입니다. 

그것이 가브리엘의 “은총”의 말과 만나 축복이 된 것이지요. 

만일 마리아가 가련형의 여인이었다면 그 크나큰 운명의 바람에 

휘청거리며 비틀거렸겠지요?그렇다면 그게 무슨 은총이겠습니까? 

강요된 은총은 은총이라기보다 폭력인 걸요. 보십시오. 

저 그림의 힘은 천사의 미소가 자연스레 마리아의 신비로 흐르고, 

마리아의 신비와 경이가 천사의 온화함과 짝하고 있다는 데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저 그림에 매료되는 것은 우리가 바로 그 신비를 알고 있기 때문인 거겠지요? 

세상도 없고 나도 없고 오로지 경이만이 있는 그 축복! 

그 축복받은 경이와 신비의 힘으로 거듭나 마리아는 무거운 운명에 토를 달지 않고 받아들일 수 있는 거 아닐까요? 

온전히 받아들임으로써 아이를 온전하게 지킬 수 있는 엄마의 힘을 자기 안에서 발견하고 키워가게 된 겁니다.


이제 그림의 배경을 자세히 보십시오. 바닥의 타일이나 벽면에, 삼손에서 모세 그리고 다윗에 이르기까지 

구약의 유명한 영웅들과 사건들이 삽화로 들어가 있습니다. 

그 모두가 아이를 가진 마리아의 신비를 떠받치고 있습니다. 

아이를 가진 마리아는 돌연변이로 태어난 예외적 존재가 아니라 오래된 전통이 품어 키운 전통의 꽃이라는 거겠지요. 


신묘년 새해가 시작되었습니다. 

우리 안에는 우리가 이생에서 키워내야 할 우리의 소중한 꿈, 새로운 태양이 수태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우연히 던져진 왜소한 존재가 아니라 우주와 자연과 역사가 마침내 낳은 세계의 주인공인 겁니다. 

우리에게는 우리가 품고 있는 신의 아이를 지켜야 할 사명이 있습니다. 

그 사명에 눈뜨는 순간 우리는 부드럽게 우리를 지키고 있는 우리의 수호천사를 보게 될 것입니다.



같은 그림 해설 : 우정아의 아트 스토리 [119] 아래위가 뒤집혀 있는 마리아의 대답





[이주향의 그림으로 읽는 철학]

(이주향 | 수원대 교수·철학) 

경향신문(2011.1.02 ~ 2011.12.21)


< 명화를 철학적 시선으로 감상하는 것도 재미있겠다. >


(1) 반 에이크 ‘수태고지(경향신문 2011.01.02) 


(2) 클림트의 ‘다나에(2011.01.09)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101092059515&code=990000


(3)벨라스케스 '거울을 보는 아프로디테'(2011.01.16)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101161950025&code=990000


(4) 샤갈의 ‘거울’(1915)(011.01.23)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101231856245&code=990000


(5) 안토니오 카노바의 '에로스와 푸시케'(2011.01.30)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101302056175&code=990000


(6) 루벤스 '잠든 에로스를 지켜보는 푸시케'(2011.02.06 20)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102062038055&code=990000


(7)수잔 발라동 '아담과 이브'(2011.02.13)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102131951005&code=990000


(8) 렘브란트 ‘탕자의 귀환'(2011.02.20)


(9) 루벤스의 '사슬에 묶인 프로메테우스'(2011.02.27)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102271853475&code=990000


(10) 엘리후 베더의 ‘스핑크스의 질문자'(2011.03.06)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103062122175&code=990000




(11) 폴 고갱 ‘신의 아이'(2011. 03. 13)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103132111545&code=990000


(12) 고흐 ‘슬픔'(2011. 03. 20)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103202125135&code=990000


(13) 고흐 ‘감자 먹는 사람들'(2011. 03. 27)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103271834025&code=990000


(14) 밀레의 만종(2011. 04. 03)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104032048185&code=990000


(15) 조지 클라우센 '들판의 작은 꽃'(2011. 04. 10)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104101918485&code=990000


(16) 렘브란트, 십자가에서 내려짐(2011. 04. 17)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104171918265&code=990000


(17) 레옹 제롬의 ‘피그말리온과 갈라테이아(2011. 04. 24)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104241919505&code=990000


(18) 르네 마그리트의 ‘연인'(2011. 05. 01)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105012004035&code=990000


(19)조르주 드 라 투르의 ‘등불 아래 참회하는 막달라 마리아'(2011. 05. 08)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105081917115&code=990000


(20) 들라크루아의 ‘격노한 메데이아'(2011. 05. 15)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105151928275&code=990000




(50) 브뤼겔 ‘베들레헴의 인구조사'(2011.12.21)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112212057135&code=9900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