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 사찰의 배흘림기둥을 수수깡으로 만들고 있는 흰개미가 결국 바퀴벌레로 판명됐다. 흰개미가 그저 흰색 개미인 줄 알았던 사람들은 이 무슨 황당한 얘기인가 싶겠지만, 흰개미는 우선 개미가 아니다. 전통적 사회성 곤충으로 알려진 개미, 꿀벌, 말벌, 흰개미 중에서 개미, 꿀벌, 말벌은 모두 벌목에 속하지만 흰개미는 그들과 동떨어진 메뚜기류의 곤충이다.
형태에 따라 생물을 분류하던 예전에는 온갖 주장이 난무했지만 DNA 정보를 분석하게 되면서 곤충 목(目) 간 관계가 한층 선명해지기 시작했다. 2007년 런던자연사박물관 연구진은 국제 학술지 바이올로지 레터스에 흰개미목을 바퀴벌레목에 합류시켜야 한다는 논문을 게재했다. 최근 미국곤충학회가 이를 받아들여 정식 공표했다.
그렇다고 해서 흰개미가 우리 부엌에 사는 바퀴벌레의 직계 사촌이라는 것은 아니다. 우리나라 강원도 산속에도 살고 있는 갑옷바퀴(Cryptocercus)와 가장 가까운 계통으로 드러났다. 갑옷바퀴는 암수 한 쌍이 썩어가는 나무에 굴을 파고 자식을 기르는 특별한 바퀴벌레다. 우리 연구실에서도 1990년대 후반부터 이들을 연구해 흰개미처럼 자식들이 부모에게 영양분과 공생균이 들어 있는 내장 분비물을 전수받는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가족 단위로 사는 갑옷바퀴보다 더 복잡하고 거대한 사회를 구성하도록 진화한 바퀴벌레가 다름 아닌 흰개미다.
나는 세상에서 매우 희귀한 곤충 중 하나인 민벌레를 연구해 박사 학위를 받았다. 내가 민벌레 연구를 고집한 것은 민벌레가 흰개미의 사촌이라는 당시 학계의 분류 체계 때문이었다. 나는 흰개미의 사회성 진화 과정을 밝히고 싶었다. 흰개미의 소속을 확정한 세계 곤충학계는 이제 다음 목표로 민벌레를 들여다보고 있다. 그러나 나는 올봄 미국에서 출간할 곤충 다양성 책의 민벌레목을 집필했건만 끝내 결론을 내지 못했다. 이러다 민벌레도 바퀴벌레로 판명되는 건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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