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조선일보 2011.02.11 주경철 서울대 교수·서양근대사)
1956년, 이집트 대통령 나세르는 아스완댐 건설을 위해 미국과 소련 양측 모두와 협상을 벌였다. 미국은 이 기회에 나세르를 서구 영향력하에 붙들어 두기 위해 경제 원조의 대가로 여러 굴욕적인 조건들을 강요했다. 격분한 나세르는 소련과 댐 건설 계약을 맺었을 뿐 아니라 수에즈운하를 국유화하는 조치를 취했다. 유럽 경제의 생명줄과도 같은 원유 수송로가 막힐까 두려워한 영국과 프랑스는 곧바로 이스라엘과 짜고 이집트를 공격했다.
이스라엘은 운하 근처의 시나이반도에 장래 수상이 될 아리엘 샤론이 지휘하는 낙하산 부대를 투입하는 동시에 티란해협의 통제권을 장악했다. 중립적 중재자로 가장한 영국과 프랑스는 즉각적인 휴전 그리고 이집트와 이스라엘 양측 모두 운하에서 10마일 뒤로 철수할 것을 요구했다. 그런데 실제 10마일 안에는 이집트 군대밖에 없었으므로 이는 곧 이집트 보고 운하에서 손을 떼라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당연히 이집트는 철수 요구를 거부했고, 이를 빌미로 영국과 프랑스는 군대를 동원하여 운하의 북부지대를 점령했다.
그러나 사태는 그들의 생각과 다르게 돌아갔다. 곧 소련이 개입하겠다고 위협했고 이집트군은 운하를 통과하는 원유 수송을 봉쇄했다. 세계의 투자자들이 영국의 파운드 스털링화를 투매하기 시작하면서 영국은 재정위기에 몰렸다. 심지어 미국마저 두 나라가 미국 몰래 군사행동을 한 데 대해 배신감을 느꼈다. 아이젠하워 대통령은 영국의 앤소니 이든 수상에게 전화를 걸어 "앤소니, 자네 제정신인가? 자네는 나를 속였어"라고 말했다.
미국의 압박에 두 나라는 굴복했다. 영국, 프랑스, 이스라엘군의 철수로 나세르는 재개통된 운하의 통제권을 확실히 장악했고, 당시 태동한 범아랍주의운동의 대부가 되었다. 이 사건을 통하여 소련은 중동지역에 첫 번째 중요한 거점을 확보하게 된 반면 영국과 프랑스는 지금까지 누려왔던 글로벌 식민지 제국의 위세를 급속히 상실했다. 세계 정세가 새로운 단계로 들어간 것이다.
수에즈운하를 통제하는 이집트는 세계의 운명을 결정짓는 급소 중 한 곳이다. 현금의 이집트 사태를 주시해야 하는 이유가 그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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