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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경철의 히스토리아] [98] 세계사 속의 한국

바람아님 2013. 11. 2. 22:06

(출처-조선일보 2011.02.18 주경철 서울대 교수·서양근대사)


일본의 저명한 문예평론가이자 사상가인 가라타니 고진의 책 〈일본 정신의 기원〉을 보다가 흥미로운 내용들을 발견했다. 그는 일본 사상의 특징에 대해, 모든 외래 사상들이 일본에 들어올 때 결코 억압되는 적 없이 기존의 것들과 '잡거'한다는 점을 든다. 불교든 유교든 혹은 서구 사상이든 적당히 변조되어 신토(神道)에 포용된다는 것이다. 그는 일본이 주변부 섬나라이며, 또 한 번도 군사 정복을 당하지 않았다는 데에서 그렇게 된 근본 원인을 찾는다. 또 일본이 그처럼 군사 정복을 당하지 않을 수 있었던 이유를 한반도의 존재로 설명한다.

중국·몽골·러시아와 일본 사이에 한반도가 있어 이곳에서 침입이 일차적으로 저지되었다. 14세기에 중국에서 아라비아에 이르는 지역을 순식간에 정복한 몽골도 한반도를 완전히 지배하는 데에는 30년이나 걸렸다. 몽골이 일본 정복을 단념한 이유는 일본에서 주장하는 것처럼 가미카제(神風)가 불었기 때문이 아니라 고려의 저항에 힘을 소진해 버렸기 때문이다.

그 반대로 일본의 힘이 엄청나게 강해져서 대륙의 지배로 향할 때 그것이 좌절된 것 역시 한반도에 부딪혔기 때문이다. 16세기 말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막강한 군사력을 가지고 명 제국을 정복하겠다고 나섰다. 당시 일본의 군사력이 어느 정도 수준인지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을 수 있지만, 일부 학자들은 서구의 총포를 들여와 개량한 후 수십만 정을 생산한 일본군의 화력이 당시 세계 최강이라 주장하기도 한다. 전통적인 사무라이 세력에 이처럼 강력한 화력이 더해졌으니 중국을 정복하겠다는 것이 반드시 허무맹랑한 이야기만은 아니었다. 사실 명 제국 쇠퇴의 주요 원인 중 하나가 왜구(倭寇)라는 점은 많은 역사가들이 인정하는 바이다. 그런데 이런 강력한 해양력이 대륙을 향해 팽창하려다가 한반도에서 좌절되고 만 것이다.

문예비평가의 예리한 견해를 통해 동아시아 역사의 특성에 대해 새삼 다시 생각해 보게 되었다. 한국과 일본, 중국 등 각국의 역사는 결코 홀로 성립되지 않는다. 역사 교육을 강화하려 한다면 '우리만의 역사'를 고집할 것이 아니라 '세계사 속의 한국사'를 가르쳐서 학생들이 넓은 시야를 갖추도록 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