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조선일보 2013.02.05 손철주 미술평론가)
흙내 풍기는 시골 여인이 들판에 서 있다. 고개 돌려 어딘가를 골똘히 지켜보는 뒷모습이다. 얼굴이 안 보여 그럴까, 겉에 입은 일옷에 눈길이 먼저 간다. 선바람으로 나선 매무시가 분명한데, 차림차림이 뜯어볼수록 야무지다.
머리에서 발끝까지 요모조모 구경해 보자. 머리쓰개는 터번처럼 꾸몄다. 수건으로 묶은 뒤쪽 매듭이 도톰하다. 그녀의 숄더백은 무얼까. 짚으로 만든 망태기다. 어깨에 메었고 허리춤에 드리웠다. 소맷부리는 팔뚝이 드러나도록 감아 올렸다. 들일을 하려면 모쪼록 가든해야 한다.
치맛주름이 흐트러진 것은 자락을 허리 위로 올려붙인 탓이다. 제 딴에는 무릎 굽히기가 편하게끔 손봤다. 무엇보다 흥미롭기는 살짝 드러난 속바지다. 양쪽 가랑이를 무릎께에 묶어 반바지 길이로 맞췄다. 그래 놓고 보니 니커보커스 팬츠와 비슷한 스타일이 됐다. 들메끈을 한 짚신은 요즘의 무엇과 닮은꼴일까. 굳이 꿰맞추자면, 가느다란 스트랩이 발등을 가로지르는 샌들이 떠오른다.
점점 여인의 얼굴이 궁금해질 판이다. 억실억실한 인상이 혹 아닐까. 호미 자루를 그러잡은 손아귀와 근골이 세찬 장딴지에서 그런 믿음성이 절로 생긴다. 눈여겨봐라, 봄볕에 그은 살갗까지 좀 탱탱한가.
그림 속에 쓰인 '군열(君悅)'은 선비화가 윤용(尹容·1708~1740)의 자(字)다. 윤용은 할아버지 윤두서와 아버지 윤덕희의 화풍(畵風)을 본받아 묘사가 잘된 그림을 그렸다. 이 정겨운 풍속화도 집안의 내림 솜씨 덕이다.
농사꾼의 아내는 손에서 호미가 떠나지 않는다. 여성 시인 김삼의당(金三宜堂)이 읊은 대로다.
'지는 해 산을 넘자/ 비로소 호미를 씻지
달이 지고 해가 뜨면/ 씻은 호미 다시 든다네.'
저 여인의 스타일은 부러 부린 멋이 아니다. 일이 패션을 만든다. 비둘기 브로치 하나 달고 '평화' 운운하는 게 우스운 꼴이다.
윤용-봄 캐는 여인(나물 캐는 여인)
참고 : 윤두서-채애도(採艾-쑥 캐는 그림, 부분)
진경산수화/풍속화를 최초로 그리기 시작한 윤두서의 나물캐기로
배경에 먼산을 묘사한 것이 아쉬운 점으로 지적되며 산수화에 서민생활(풍속)을 삽입한 그림으로
풍속화로서 완전한 영역을 확립하지는 못한 단계로 후일의 채석장등과도 대비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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