文學,藝術/고전·고미술

손철주의 옛 그림 옛사람 [42] 후다닥 벗어던진 신발 뒤편, 흐드러진 봄날이 숨었구나

바람아님 2013. 11. 8. 20:45

(출처-조선일보 2013.01.28  손철주 미술평론가 )



소한과 대한을 다 넘겼다. 추위가 끈덕져도 입춘이 코앞에서 서성거린다. 하마 봄이 그리우니 봄 그림 하나를 봐야겠다.

기둥에 글씨가 있다. 떡하니 써 붙이기를, '사시장춘(四時長春)'이다. '사철 내내 봄날'이란 말씀이렷다. 배경은 살림집 몸채 뒤에 딸린 별당이다. 키 큰 나무 바늘잎에 푸른 빛이 감돌고 앉은뱅이 꽃가지에 하얀 망울이 돋긴 했다. 그런들 겨우 첫봄일 텐데, '내내 봄'은 그림 어디에 숨었단 말일꼬.

먼저, 대낮인데 꽁꽁 닫힌 지게문이 수상쩍다. 문살이 반듯하고 돌쩌귀에 뒤틀림이 없다. 안에서 빈틈없이 잠갔다는 얘기다. 쪽마루는 동바리가 제법 높다. 치마 입은 여자라면 한 걸음에 오르기 어렵다. 그래서일까, 신발 두 켤레의 놓임새가 서로 다르다. 여자의 분홍 꽃신은 가지런하다. 보나마나 남자가 곁부축해줬다. 남자의 검정 갖신은 후다닥 벗은 티가 난다. 어지간히 급히 방에 들어갔다. 안에서 벌어질 일이야 묻지도 말자. 흐드러진 봄날은 뒤뜰 꽃나무에도 언덕바지 물줄기에도 아닌, 정작 방 안에 있었다.

딱하기는 계집종이다. 술잔을 받쳐 들고 오다 숨소리마저 죽인 문 앞에서 엉거주춤하는 꼴이다. 땋은 머리에 드리운 연분홍 댕기조차 애잔해 보이는 나이라서 화가는 당황한 아이의 표정을 차마 그리지 못했다. 명색이 '춘화(春畵)'인데, 이토록 얌치 바른 그림은 보기 어렵다. 봄맛이 나야 춘화다. '얼음 위에 댓잎 자리 보아 임과 얼어 죽을망정 이 밤 더디 새기를 바라는' 겨울의 정념은 그리기에 버겁다. '사시장춘'은 어떤가. '원앙 이불 안에 사향 각시 안고 누운' 봄날의 꿈이 아지랑이처럼 어른댄다.

그린 이는 춘정(春情)에 밝은 화가 혜원(蕙園) 신윤복(申潤福)으로 추정된다. 이 그림이 성에 덜 찬다고? 마침 춘화 전시가 서울 사간동 갤러리현대에서 열리고 있다. 방 안에서 벌어진 풍경을 죄다 볼 수 있다.


'사시장춘'… 전(傳) 신윤복 그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