文學,藝術/고전·고미술

손철주의 옛 그림 옛사람 [41] 졸렬한 듯 오만, 속 좁은 듯 굳나니… 나는 선비다

바람아님 2013. 11. 6. 11:07

(출처-조선일보 2013.01.20  손철주 미술평론가)


머리에 쓴 복건 속으로 상투관과 망건이 비친다. 빛 고운 옥색 도포가 앉음새에 따라 주름졌다. 손때 묻은 책상은 나뭇결이 살아있고, 좌우에 놓인 책갑(冊匣) 사이로 책 한 권과 끈 달린 안경, 거북 껍질 무늬로 장식한 두루마리 등이 나란하다. 왼쪽 책갑이 열려 있는 것을 보면 책을 막 끄집어내 읽다가 앉은 자리에서 안경을 벗고 몸을 가눈 낌새다. 그 모습이 모델의 신분과 어울리는지 화가는 소도구를 살린 채 그림을 완성했다. 그린 이는 한정래(韓廷來), 이력이 알려지지 않은 화가다.


초상화의 주인공은 임매(任邁·1711~ 1779)다. 그는 대대로 서울살이를 해온 세족(世族)으로 현령과 낭관 등의 벼슬을 지냈

다. 조부가 쓴 황당한 야담집을 읽은 뒤 그보다 훨씬 리얼한 이야기책 '잡기고담(雜記古談)'을 펴낸 문인이기도 하다.

첫인상은 강파르다. 살이 쪽 빠진 얼굴이 댓바람에 들어온다. 눈가에 잔줄이 오글오글하고 뺨뼈가 튀어나와 서그럽다 할 성품은 아니다. 자기 됨됨이를 자평한 글이 화면 오른쪽에 있다. 

'졸렬한 듯해도 오만하고 속 좁은 듯해도 굳은데, 

게으르고 어수선한 것이 참모습이다. 

묻노니 어떤 사람인가. 

지금 세상에서 케케묵은 사람이라 하겠지.' 

어찌 들으면 갈피 잡기가 어려운 고백이다. 자조(自嘲)와 자부(自負)와 겸사(謙辭)가 뒤섞여 있다.
 그의 속을 짚어볼 관상이 없지는 않다. 끝이 올라간 눈매와 입가에 굵게 잡힌 세로 주름을 보라. 곁을 주지 않는 오기와 남의 말에 휘둘리지 않는 심지가 거기에 서렸다. 

  그와 평생 사귄 문인화가 이인상(李麟祥)도 그것에 걸리곤 했다. 임매는 이인상이 일껏 그려준 작품을 손가락으로 튕기거나 남이 가져가게 뒀다. 자존심이 상한 이인상이 아예 '임매만 가져라'고 써서 건넨 그림이 지금도 전한다.
 임매는 스스로 '케케묵은 존재'라 했다. 곧 시대에 뒤떨어졌다는 얘기다. 설마 물정을 몰라 물욕이 없었을까.


'임매 초상' - 한정래 그림, 비단에 채색, 64.8×46.4㎝, 

          1777년, 국립중앙박물관 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