時事論壇/橫設竪設

[만물상] 쓰레기통에 나뒹구는 돈

바람아님 2018. 8. 23. 09:12

(조선일보 2018.08.23 김기철 논설위원)


지금 베네수엘라는 마두로 대통령이 경제를 구렁으로 떨어뜨려 식량 부족 사태까지 빚고 있다.

국민 몸무게가 평균 11㎏이나 줄어들었을 정도다. 서구 언론이 이를 '마두로 다이어트'라고 부른다.

미국 국제전략문제연구소(CSIS)는 베네수엘라 GDP가 최근 4년 45%나 줄었고, 굶어 죽을지 모를 아이만 30만명이라고 했다.

쓰레기통을 뒤져 먹을 걸 찾거나 영양실조로 앙상한 아이들 사진이 신문에 하루걸러 실린다.


▶베네수엘라가 이 지경이 된 것은 1999년 집권한 대통령 차베스와 좌파 포퓰리즘, 그리고 그 뒤를 이은 마두로 정부가

실정(失政)한 탓이다. 차베스는 석유를 비롯한 주요 산업을 국유화하고, 무상 교육, 무상 의료 같은 공짜 복지를 확대했다.

풍부하게 묻혀 있는 석유가 돈줄이었다. 미국을 '악의 축'으로 몰아붙였고, '중남미 좌파 연대'를 만들겠다고 큰소리쳤다.

쿠바와 볼리비아뿐 아니라 미국 빈민에게도 석유를 싼값에 주겠다고 호기를 부렸다.

그러다 유가가 하락하자 모든 게 허사가 됐다. 작년부터 굶주림을 견디지 못해 해외로 떠난 국민이 180만명이다.


칼럼 관련 일러스트


▶노무현 정권 때인 2006년 KBS는 차베스를 미국의 신자유주의에 맞서는 대안(代案)으로 치켜세웠다.

그때 방영한 다큐멘터리 제목이 '신자유주의를 넘어―차베스의 도전'이었다.

차베스 찬양 일색인 이 프로그램은 "차베스의 실험이 우리에게 많은 것을 시사해준다"고 했다.

마치 우리가 따라야 할 모범처럼 보이게 했다.


▶어제 신문에는 쓰레기통에 나뒹구는 베네수엘라 지폐 뭉치 사진이 실렸다.

올 들어서만 4만6300%가 넘는 초(超)인플레이션 탓에 고액권 지폐마저 종이 공예 재료로 쓰일 만큼 돈 가치가 떨어졌다.

견디다 못한 그곳 정부는 이번 주 화폐 액면가를 10만분의 1로 낮추는 화폐개혁을 단행했다.

1차 대전 패전 직후 독일, 2000년대 후반 짐바브웨의 무가베 정권 때나 있었던 최악의 인플레와 경제 위기를 보는 듯했다.



1904년 러일전쟁 취재차 한국에 온 미국 기자가 잡지에 사진을 실었다.

산더미처럼 쌓인 엽전 더미 뒤에 양복 차림으로 서 있는 장면이다. 취재비로 쓰려고 150달러를 바꾼 돈이라고 했다.

100년 전 우리 처지가 그랬다. 이제는 다르다.

그러나 쓰레기통 지폐 사진은 좌파 포퓰리즘이 나라를 어떻게 망가뜨리는지 증언한다.

차베스를 '남미의 희망'처럼 치켜세웠던 방송사는 현 정권 수중에 들어가 있다.

또 다른 엉터리 '차베스의 도전'이 등장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