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일보 2018.10.27 이한수 기자)
무신론자와 교수
데니스 라스무센 지음|조미현 옮김|에코리브르|424쪽|2만1000원
'무신론자'는 철학자 데이비드 흄(1711~1776), '교수'는 경제학자 애덤 스미스(1723~1790)를 말한다.
18세기 스코틀랜드 계몽주의 사상의 두 거장이 1749년 처음 만나 흄이 사망하는 1776년까지
27년간 나눈 우정의 기록을 추적한다. 흄은 무신론자라는 혐의로 교수직을 얻지 못했고,
스미스는 흄에게 큰 영향을 받았지만 기독교 신앙을 버리지 않았다. 나이는 흄이 열두 살 많다.
사상가 사이의 우정을 그린 책은 많지 않다. 불화와 갈등을 그리는 쪽이 더 극적이기 때문이다.
흄에 대한 여러 전기도 스미스와의 우정보다는 프랑스 사상가 루소(1712~1778)와 잠깐 충돌했던
사실에 더 주목한다. 흄과 스미스의 관계는 가장 고귀한 철학적 우정의 사례라고 저자(미국 터프츠대 정치사상 교수)는
말한다. 제러미 벤담과 제임스 밀, 헤겔과 셸링, 마르크스와 엥겔스 같은 사례가 있으나 이들 각 쌍의 어느 한 사람은
영향력과 독창성이라는 점에서 흄과 스미스에 못 미친다고 단언한다.
둘은 서로 편지를 통해 우정을 나눴다. 편지에는 둘의 생각과 주장, 시사 문제와 장래 계획 등 여러 주제가 들어 있다.
초창기 편지는 '선생님께'로 시작하지만 나중에는 '나의 가장 친애하는 벗에게'로 호칭이 바뀔 만큼 가까운 사이가 되었다.
흄은 형이상학·인식론에 주로 관심을 가진 철학자였고, 스미스는 현실 문제에 초점을 맞춘 경제학자였다.
흄은 보수적인 토리당을 지지한 반면 스미스는 진보적인 휘그당 지지자였다.
둘은 다르기에 서로 존중했다. 사고의 깊이에서 상대를 인정했기 때문이다.
퇴계와 고봉, 편지를 쓰다 | ||
(조선일보 2003.02.15 한형조·한국정신문화연구원 교수) 퇴계와 고봉, 편지를 쓰다
이웃 교수의 방에 있는 고봉집을 찾았으나 문이 잠겨 있어 포기했다. 책을 읽어내려가다가 어느 순간 내가 원문을 찾고 있지 않다는 것을 발견했다. 드문 경험이다. 책은 두 부분으로 되어 있다. 익숙한 것부터 손이 가는 법이라, 2부 ‘학문을 논한 편지들’부터 읽었다. 이른바 사단칠정(四端七情)에 관한 유명한 철학적 논쟁이 담긴 부분이다. 논의는 인간의 심리적 정서적 의지적 표출의 구조와 가치를 둘러싸고 전개된다. 이황은 종교적이고, 기대승은 미학적이다. 노인 퇴계는 보통의 인간들이 이기적이고 자기중심적으로 산다는 비관 위에 서 있고, 젊은 고봉은 삶에서 생기는 갈등과 문제를 합리적으로 조정할 수 있다는 낙관 위에 서 있다. 그래서 퇴계는 칠정 너머에서 사단을 그리워하고, 고봉은 칠정 속에서 사단을 찾아내려 한다. 퇴계는 탁한 정치판 속에서 인간의 추악한 면을 볼 대로 본 사람이었고, 고봉은 이제 갓 출사한 신진 기예였던 것도 그런 차이를 낳았을 것이다. 이 논쟁은 주지하다시피 그 이후 율곡 이이와 우계 성혼과의 논쟁으로 이어졌고, 조선 유학사의 일대 공안이 되었다. 이 고민은 지금도 유효하고, 또 다른 방식으로 계속되고 있다. 책에는 고봉이 다른 학자들, 가령 항재 이항과 하서 김인후와 나눈 철학적 논쟁도 실려 있다. 고봉은 항재에게 그런 소리는 남의 비웃음을 살 것이라고 힐난했고, 항재는 고봉이 고집이 너무 세서 남의 말을 듣지 않는다고 맞받았다. 퇴계는 항재의 공부가 편협하다면서도 고봉 또한 익지 않은 주장을 자의적으로 늘어놓는다고 따끔하게 충고했다. 다시, 사단칠정에 대한 둘의 생각은 서로 다르다. 고봉은 퇴계가 지나치다고 생각했고, 퇴계는 고봉의 말을 알아듣지 못했다. 퇴계는 더 이상의 논쟁이 의미가 없다고 생각했고, 이에 놀란 고봉이 고집을 접음으로써 논쟁은 끝났다. 둘의 우정은 바로 그 지점, 논쟁을 포기한 곳에서 출발한다. 둘을 위해서는 다행한 일이지만, 조선 유학을 위해서는 슬픈 일이기도 하다. 1부 ‘일상의 편지들’은 그렇게 끈끈하고 간절한 둘의 관계를 가감없이 보여준다. 일상의 기거와 벼슬살이의 어려움, 학문의 수련, 경전에 대한 의문, 현실 정치의 비판 등에 대해 그들은 각자의 생각과 우려를 토로하고 서로 위로한다. 독자들은 이 편지들을 통해 조선의 선비들이 어디에 관심을 가졌으며, 무슨 문제를 고민했는지, 그리고 그것을 어떻게 접근했는지, 그리고 그런 과정에서 어떤 곤경을 만났는지를 생생한 육성으로 들을 수 있다. 그동안 퇴계와 고봉에 관해 쓴 논문들은 많이 있다. 소문이 무성하면 실상을 가리듯, 논문이 많아지면 주제를 도리어 가리기도 한다. 직접 대면을 원하는 사람들에게 그동안 적절한 안내를 해주지 못했는데, 이번 책은 그 아쉬움을 일거에 털어주었다. ‘쉽고 아름답게’라는 번역자의 기염 덕에, 우리는 원문을 찾지 않고도, 허리를 펴고, 조선의 대표적 문헌을 읽을 수 있게 된 것이다. /한형조·한국정신문화연구원 교수 기고자 : 한형조/ 본문자수 : 1140/ 표/그림/사진 유무 :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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