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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재천의 자연과 문화 [86] 외국어와 치매

바람아님 2013. 11. 29. 11:35

(출처-조선일보 2010.11.22 최재천 이화여대 석좌교수·행동생태학)


별나게 수다스러운 입방정에 영어회화 책까지 펴낸 개그맨 김영철이 다른 동료 개그맨들보다 알츠하이머 치매에 걸리는 시기가 길면 5년이나 늦을 것이라는 연구 결과가 나왔다. 최근 국제학술지 '신경생물학(Neurobiology)'에 발표된 캐나다 토론토대학의 연구에 따르면, 평생 모국어만 사용하는 사람들보다 외국어를 한두 개 구사하는 같은 연령대의 사람들이 알츠하이머 치매 증상을 훨씬 덜 보인다는 것이다.

치매는 다양한 원인으로 인해 뇌기능이 전반적으로 저하되면서 기억·언어·사고 등에 심각한 지장이 생겨 정상적인 일상생활을 유지할 수 없게 되는 질병이다. 세계적인 사회현상인 고령화에 발맞춰 치매 발병률도 날로 증가하고 있는데, 미국의 경우에는 65세 이상 노인 8명 중 1명꼴로 나타나고 있고 우리나라도 그 비율이 최근 8~9%에 이른다. 한국치매가족협회의 예측에 따르면, 2020년경에는 치매로 인해 고통받을 우리나라 사람의 수가 치매 환자 36만명과 그들을 돌봐야 할 가족 64만명을 합해 무려 110만명에 이를 것이란다.

2007년에서 2009년 사이에 알츠하이머 치매 판정을 받은 65세 이상 노인 환자 211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이번 연구에서는 둘 이상의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의 뇌라고 해서 노화성 손상을 덜 입는 것은 아니지만 기억력, 문제풀이 능력, 기획력 등의 감퇴 정도는 훨씬 덜하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지난 수십 년간 치매에 관한 의학 연구에 엄청난 돈과 시간을 쏟아부었지만 아직 이렇다 할 치매 예방 약물을 개발해내지 못한 상황에서 절제된 식단, 주기적인 운동 등과 더불어 활발한 외국어 사용이 건강한 노후의 삶에 도움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노인들이 꼭 영어를 해야 할 까닭은 없다. 우리 아이들이야 이다음에 가장 많이 써먹을 수 있는 영어나 중국어를 우선적으로 배울 이유가 있을지 모르지만, 치매 예방에는 우리말과 어휘나 어순이 다른 언어라면 어떤 것이든 도움이 될 것이다. 손자들 사교육비에 보탬은 되지 못할망정 다 늙은 마당에 돈까지 내며 학원에 다닐 생각은 접고, 이참에 외국인 노동자들을 위해 자원봉사를 하며 그들의 언어를 배워보면 어떨까 싶다. 이야말로 남에게 좋은 일 하며 내 뇌의 건강도 챙기는 일거양득이 아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