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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경철의 히스토리아 [116] 군 병원

바람아님 2013. 11. 28. 11:05

(출처-조선일보 2011.06.24 주경철 서울대 교수·서양근대사)


1916년 여름부터 늦가을까지 프랑스의 솜(Somme) 강 유역에서 벌어진 솜 전투는 백만 명 이상의 사상자가 발생하여 1차대전 중 가장 치열했던 전투로 알려져 있다. 프랑스·영국·이탈리아·러시아군이 연합하여 독일군에게 총공격을 가하여 고착된 전선을 돌파하려 한 것이다. 이 전투를 주도한 것은 프랑스와 영국군이었고, 그만큼 이들이 큰 피해를 입었다. 공격 첫날인 1916년 7월 1일의 전투는 영국군만 6만 명 가까운 사상자를 내서 하루에 입은 피해로는 역사상 최대치를 기록했다.

당시 영국군은 부상병에 대한 치료 체계를 비교적 잘 갖추고 있었다. 전투에서 후송된 부상병을 모두 수용할 수 있을 정도로 충분한 병상이 있었다. 마취제, 소독제, 연고, 붕대, 의료 도구 등도 충분했다. 상처 부위에서 손상된 조직을 제거하는 '괴사조직 제거' 방법도 개발되어 감염을 크게 줄였다. 의료 체제 전체를 관리하는 제도도 잘 발달했다. 전투 현장에서 부상병을 소개해 치료하고 회복을 돕는 정교한 체계가 구축되었다. 그 첫 번째 단계가 연대의 야전 응급 치료소였다. 여기에서 의료 장교가 사상자를 분류하고, 치료하기 힘든 병사를 후송했다. 후송되는 병사들은 임시 집합소를 경유해 후송병원에 보내지고, 그다음에 본국의 기지 병원으로 옮겨졌다. 이 과정에서 흔히 부상이 악화된다는 사실이 알려지자 하위 단계에서 바로 외과 수술을 시도하는 방향으로 개선이 이루어졌다.

문제는 이런 체제가 결코 완벽하게 작동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7월 1일 전투에서는 최악의 상황이 벌어졌다. 무엇보다 전장에서 야전 응급 치료소로 환자를 데리고 오는 수단이 부족했다. 대대에는 들것 운송인들이 32명 있었는데, 이들이 16명을 운반하는 데에만 한 시간이 걸렸던 것이다. 이날 대대마다 300명 이상의 부상병이 병원에 들어왔지만, 수많은 병사들이 부상당한 자리에 그대로 누워서 죽어갔다. 이 가운데 3분의 1 정도는 야전 병원으로 옮기기만 하면 목숨을 구했을 사람들이었다. 쇼크(혈류량의 급격한 감소), 중간 정도의 허파 천공이나 복부 파열 같은 부상이 그런 것들이다.

강한 군사력은 무기와 전술에서만 나오는 게 아니라 병원체계에서도 나온다. "미국의 전투력은 우리 병원에서 나온다"는 미군 재활병원인 월터리드 병원의 캐치프레이즈는 과장이 아니다. 최근 우리의 열악한 군 병원 실태가 보도되었다. 하루바삐 개선되어야 할 문제임에 틀림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