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일보 2018.12.29 박해현 문학전문기자)
비극 문학
채수환 지음|지식산업사|324쪽|1만8000원
"비극적 이야기 전통은 서양문화사에서 가장 중요한 세 시기
―희랍고전기, 르네상스기 그리고 19세기―에 대표적인 서사 양식이 됨으로써 서양인들이
가장 소중히 여기는 가치관을 형성하고 삶의 의미와 지혜를 전수해 주는 문학 전통이다."
채수환 홍익대 영문과 교수가 서양문학사의 핵심을 비극의 관점에서 풀이한 책이다.
저자는 비극이 '희랍 고전 문명의 발명품'이라고 했다.
호메로스의 서사시 '일리아스'엔 '낙관론적 현세주의'와 '절망적 숙명론'이 양립하고,
그 둘 사이의 긴장을 통해 '비극적 비전'이 탄생했다는 것.
호메로스의 영웅들은 '생명보다 소중한 것은 없으나 이 생명이 어차피 스러질 것이라면 어떻게 사는 것이
가장 고귀하고 숭고하게 사는 것인가'라며 유한한 삶의 비극에 굴복하지 않는 인간의 위엄을 지향했다.
비극의 핵심은 '인본주의'라는 얘기다.
'비극적 비전'은 소포클레스의 '참주(僭主) 오이디푸스'를 비롯한 비극의 융성을 낳았지만,
인본주의를 억압한 기독교 시대엔 사라졌다.
하지만 비극은 셰익스피어와 라신의 희곡을 통해 부활해 만개했고, 현대에 들어와 헤밍웨이의 소설 '노인과 바다' 등의
밑거름이 됐다. 비극은 영화에서 다양한 변주를 통해 거듭나고 있다.
문학은 '비극의 지혜'를 통해 인간에게 불행을 극복할 정신의 힘을 제공한다.
이 책의 결론은 "우리는 삶을 비극적인 것으로 파악하기 시작할 때 비로소 삶을 제대로 살기 시작한다"는
시인 예이츠의 말을 인용하는 것으로 꾸며졌다.
출판사 서평 왜 사람들은 비극적인 이야기에 끌리는가? 한국 최초의 비극문학통사이자 비극미학론 아리스토텔레스 이론을 비판, 신비극이론을 성립시키다 바람이 몰아치는 요크셔의 들판에서 굶주린 사자처럼 떠돌던 히스클리프, 그와 같은 비극물에 잠 못 이룬 밤을 기억하는가? 그 말로 설명할 수 없는 희열의 경험을 문학이론으로 명쾌하게 해석한 독창적인 저작이 출간된다. 영미 고전문학과 근대문학을 아울러 연구해 온 채수환 교수는 서구문학의 정수를 ‘비극’으로 포착하여 희랍비극에서 출발, 중세를 거쳐 근현대 문학과 영상예술에 반영된 ‘비극적인 것’을 꿰뚫고 있다. 그 결과 서양문학자, 철학자들의 논의를 총괄함과 동시에 비극론의 전범인 아리스토텔레스 이론에 대한 논리정연한 비판에까지 나아가고 있다. 특별히 이러한 서구 비극문학‘통사’는 희랍비극만이 소개되어 있는 국내에 최초로 시도되는 작업이기에 더욱 획기적인 결과물이 아닐 수 없다. 비극적 비전으로 고대부터 현대 서사예술까지 망라하다 서구 문학의 비극 작품에 구현된 인간관이자 신념인 ‘비극적 비전’은 19세기에서 20세기 초엽까지 가장 번성했던 갈래 〔genre〕인 소설 - 예컨대 《테스》, 《적과 흑》, 《백경》 등 - 에 잘 구현되어 있다. 그러나 20세기 중엽 이후 영상예술이 이야기 전통의 주도권을 장악한바, 저자는 제2장 2절에서 서사문학의 세 갈래를 ‘비극’, ‘승리의 멜로드라마’, ‘패배의 멜로드라마’로 제시, 채플린의 초창기 무성영화부터 헐리우드 영화까지 예시하고 있다. 안데르센의 《성냥팔이 소녀》부터 《로미오와 줄리엣》, 《패왕별희》, 《브레이브하트》, 《타이태닉》, 《라이언 일병 구하기》, 《글루미 선데이》 하물며 《광해》, 《택시 운전사》, 《1987》까지 포함된 목록을 보면서 독자들은 문학과 영상으로 접한 감동이 논리적으로 명료하게 해설되는 데서 오는 기쁨을 누리게 된다. 자신이 본 영화나 드라마가 어디에 속하는지 파악할 수 있는 눈이 생기기 때문이다. 예컨대 《미스터 션샤인》이나 《1446년》은 승리의 멜로드라마이겠는데 라고 말이다. 따라서 영화, 드라마, 뮤지컬, 연극 등 다양한 장르에서 서사의 영상화가 활발히 진행되고 있는 이때 이 책은 문학도와 창작을 지망하는 작가, 배우들에게 유용할 뿐만 아니라, 문자 및 영상예술로 삶의 안식과 위로를 얻는 우리 현대인들에게 매력적으로 다가온다. 아리스토텔레스 이론을 비판, 신비극문학론을 정립하다 비극의 서사를 세 갈래로 나눈 저자의 시도는 철옹성과 같은 아리스토텔레스의 비극론을 무너뜨린다는 점에서 학술적으로도 매우 중요한 의의가 있다. 저자는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한 비극의 감정인 ‘두려움과 연민’은 패배의 멜로드라마 감정을 가리킨다고 반박한다. 또한 그 두 감정의 결과라고 본 카타르시스 이론 역시 재고해야 함을 지적한다. 승리의 멜로드라마가 제공하는 안도와 환희의 감정이 가져다주는 카타르시스(淨化)가 패배의 멜로드라마에서 느끼는 연민과 두려움의 그것보다 더 뚜렷하고 강력하기 때문이다. 나아가 저자는 비극 이론의 역사를 훑은 바탕 위에 비극적 비전과 희극적 비전을 비교 대조하고 비극적 주인공과 비극적 진실, 플롯 등을 총체적으로 조망함으로써 새로운 비극이론을 정립해 나가고 있다. 비극의 가장 적절한 감정은 ‘찬탄과 외포’이며, 비극의 최종 효과는 심리적 정화(카타르시스)가 아니라 정신적 깨달음이라는 논리가 그것이다. 저자가 예시한 바대로 보통 사람은 친부를 살해하고 어머니와 결혼하는 오이디푸스의 극단적 운명을 맞이하지는 않기 때문에 더욱 설득력이 크다. 오히려 두려움보다는 임종에 즈음하여 자신의 운명과 화해하는 오이디푸스 (소포클레스의 《콜로노스의 오이디푸스》)를 보고 경외심의 찬사가 터져 나온다는 것이 더 맞는 지적일 것이다. 삶과 겹쳐지는 비극이야기와 그 반전
제8장에서 언급되듯이 비극의 구조는 양가적이다. 패배의 멜로드라마나 승리의 멜로드라마와 다르게 파국을 통한 낭비와 함께 그와 반대되는 성취와 획득이 있는 것이다. 이러한 비극의 플롯은 크게 보면 우리 인간의 삶의 진실과도 다르지 않다. 인간은 매 순간 가치의 갈등을 느끼며 고비마다 중요한 선택의 순간에 직면한다. 또한 하나의 선택에는 얻는 것도 있지만 동시에 잃는 것도 있게 마련이다. 그러나 비극의 주인공은 상실감에 완전히 무너지지 않는다. 《노인과 바다》의 산티아고 노인은 상어 떼에게 청새치를 모두 잃고 나서도 유유히 배를 타고 돌아온다. 비극의 묘미는 저자가 ‘비극적 역설’(tragic paradox)이라고 명명한 바로 여기에 있다고 할 것이다. 필연(결정론)이 운명을 옥조여 나가는 국면에서 자유의지에 따라서 행동을 선택한 결과 맞게 되는 파국에서조차 우리는 그 ‘비극적 고통’을 감내하고야 마는 인간에 잠재된 무한한 가능성, 의지의 거룩한 힘을 전달받는 것이다. 왜 비극은 아름다운가
비극의 주인공은 폴뤽세네와 같이 죽음이라는 극한의 고통 앞에서도 당당할 수 있는 기백의 소유자이다. 그럼에도 동시에 리어 왕처럼 무지와 맹목 같은 인간의 본유적 약점을 지니고 있다. ‘한 치 앞도 보지 못하는’ 비극 작품의 인물을 보면 곧 인간 존재의 심연과 내밀하게 대면하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고대부터 근현대 비극적 주인공의 운명을 파고드는 저자의 논지를 따라가면서 독자들은 자신의 삶에 비추어 그들의 역경을 함께 고민해 보고 스스로의 해답을 찾아가는 소중한 순간들을 경험하게 된다. 여기에 ‘비극의 진실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은 인간의 한계와 함께 그 가능성에 대한 인식’이라는 저자의 논의를 더한다면 내면적으로 더욱 굳건해지는 정신을 마주하게 될 것이다. 이처럼 비극은 각박한 현대에서 자신의 드라마를 구현하며 살아나가는 우리들에 잠재한 의지를 끌어올리는 자극제라고 할 수 있다. 비극문학의 본질에 대한 본격적이고 원론적인 연구서이면서도 우리 안의 ‘비극적 감정’을 한껏 고양시키는 신비로운 이 책으로 격조 높은 감흥을 느껴보길 추천한다. [인터넷 교보문고 제공]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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