人文,社會科學/책·BOOK

[내 책을 말한다] '우리가 글을 몰랐지 인생을 몰랐나'

바람아님 2019. 2. 6. 21:39

(조선일보 2019.02.02 장혜원 남해의봄날 기획편집인)


할머니 스무 명이 모여 한 권의 책을 만들었다.

살아온 생을 모두 합하면 1600년이 넘는 세월. 별일 아닌 듯 써 내려간 글에 한국 근현대사가 담겨 있고,

여성의 삶이 녹아 있다. 일본군에게 잡혀갔다가 돌아오지 못한 친구, 전쟁 중 피란길에 죽은 동생을 업고

온종일 걸어야 했던 어느 날, 혼자된 친구를 살갑게 챙겼더니 남편을 좋아해 느꼈던 배신감,

글을 몰라 거리의 간판이 다 외국어처럼 느껴졌던 답답함 등 가슴을 울리는 할머니들 이야기는 끝이 없다.


[내 책을 말한다] '우리가 글을 몰랐지 인생을 몰랐나'


만만치 않은 삶을 꿋꿋이 헤쳐 온 할머니들은 글만이 아니라 따뜻하고 개성 넘치는 그림까지 그렸다.

그림의 재미에 빠져 저마다 수십, 수백 장을 그려, 모두 모으니 수천 장이 되었고 실력도 깜짝 놀랄 정도다.

지난해 서울 한 갤러리에서 전시를 열었는데 매일같이 사람이 가득 찼고 모두 할머니들의 예술 감성에 감탄했다.

올해는 뉴욕, 워싱턴 DC, 필라델피아 등 미국 전시 계획도 잡혀 있다.


책과 전시로 어엿한 작가가 된 스무 명의 할머니는 사실 글과 그림을 배운 지 불과 2~3년밖에 되지 않았다.

그러나 쉽지 않은 생을 힘껏 살아온 자세로 공책과 스케치북을 채웠고 그 속에 진한 인생이 담겼다.

이를 모으고 추려 '우리가 글을 몰랐지 인생을 몰랐나'(남해의봄날)로 엮었다.


편집자인 내게 스무 명 할머니는 웃음도 눈물도 많은 우리 할머니 같고, 바쁘다는 핑계로 안부 전화도 겨우 드리는

엄마 같고, 아직도 인생에 어설픈 내 모습 같고, 또 가끔은 마냥 꿈 많은 우리 아이 같았다.

할머니 안에 살아 있는 그 많은 이들의 손을 잡고 이야기를 들으며 마음이 풍성해졌다.

온 가족이 모이는 명절, 집집마다 따뜻한 그림과 글을 나누며 온기 가득한 이야기들이 오고 가면 좋겠다. 




우리가 글을 몰랐지 인생을 몰랐나
저자 권정자, 김덕례, 김명남, 김영분, 김유례, 김정자,

라양임, 배연자, 손경애, 송영순, 안안심, 양순.. 외 8명
남해의봄날/ 2019.02.01/ 192 p/ 18,0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