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2019.01.31 한소범 기자)
에세이 '공감연습'과 저자 레슬리 제이미슨(오른쪽). 왼쪽 표지 사진은 미국 사진작가 소피 해리스 테일러가 찍은 ‘Epidermis(표피)’시리즈 중 하나인 ‘Francesca’. 여드름 등 피부질환이 있는 여성들이 화장을 벗고 민낯을 드러냄으로써 상처를 마주하는 용기를 나타냈다. 문학과지성사 제공 |
레슬리 제이미슨 지음ㆍ오숙은 옮김ㆍ문학과지성사 발행ㆍ386쪽ㆍ1만 5,000원
혐오. 최근 몇 년간 한국사회에 가장 큰 생채기를 남기고 있는 현상이다. 혐오는 대상을 가리지 않고 날을 세우고 있다.
많은 사람들이 가난을, 장애를, 여성을 혐오하고 있고 이주노동자를, 성소수자를, 난민을,
심지어 참사로 가족을 잃은 이들까지 혐오한다.
혐오를 극복할 대안으로 공감이 호명되지만 여전히 많은 이들은 타인의 고통과 처지를 가늠하는 게 쉽지 않다.
공감이란 무엇인가. 우리는 어떻게 타인의 고통을 함께 할 수 있을까.
공감 능력 역시 누군가의 고통에 관심을 기울이고자 하는 ‘연습’을 통해 기를 수 있다고 가정한다면,
미국의 젊은 작가 레슬리 제이미슨의 책 ‘공감연습’이 도움이 될 수도 있겠다.
약 8년에 걸쳐 각종 지면에 실린 에세이 11편을 한데 엮은 책으로 제이미슨의 책이 국내에 소개되기는 이번이 처음이다.
책은 무명작가 제이미슨을 단번에 ‘제2의 수전 손택’으로 만들었다.
2014년 미국 출간 당시 뉴욕타임스 등이 선정한 ‘올해의 책’에 꼽히며 베스트셀러가 됐고, 국제 문학인 단체인 PEN클럽이
수여하는 PEN 문학상 에세이 부문 후보로 지명되기도 했다.
책에는 의료배우라는 직업 경험, 연인과의 결별, 밤거리의 폭행 등 사적인 고통부터, 울트라마라톤 취재,
교도소에 갇힌 수감자 면회, 국가에 착취당하고 버려진 지역 답사, 잘못된 재판과 억울하게 옥살이한 소년들의 이야기 등
공적인 고통에 대한 사유가 실려있다.
하나로 엮을 수 없을 것 같은 소재와 주제들이지만 제이미슨은 이를 ‘공감’이라는 키워드로 한데 묶어낸다.
책의 표제작이자 첫 장을 여는 ‘공감연습’(원제 ‘The Empathy Exam’)에는 ‘의료배우’라는 낯선 직업 체험을 통해 실제로
타인의 고통을 완벽하게 상상하는 것이 가능한지, 이해했다고 말하는 것이 기만은 아닌지에 대한 작가의 고민이 담겨있다.
의료배우는 의과대학생들이 환자를 얼마나 이해하고 공감하는지 알아보기 위해 실시하는 ‘공감시험’에서 환자 역할을
연기하는 이다. 작가는 의료배우로 일하며 자간전증, 천식, 충수염 등의 증상을 연기하고 때로는 입술이 파란
아기 엄마의 역할도 했다.
제이미슨은 환자를 연기할 때 수면장애, 식욕변화, 집중력 감퇴 등 건강 점검 사항을 물건 목록을 읽듯이 읊는 의대생들을
보며 진정한 공감은 어떻게 해야 가능한지 생각하게 됐다.
“공감은 그저 ‘정말 힘드시겠어요’ 하는 말을 꼬박꼬박 해주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고난을 빛 속으로 끌어와 눈에 보이게 만드는 방법을 알아내는 것이다.
공감은 그저 귀를 기울이는 것이 아니라, 귀 기울여 들어야 할 답을 하게끔 질문하는 것이다.”
공감에 대한 질문은 의대생들을 향하기도 하지만, 이를 활자로 옮기는 작가 자신을 향하기도 한다.
피부에 벌레가 기어 다니는 느낌과 피부 밑에서 이상한 섬유가 나오는 (혹은 섬유가 나온다고 믿는)
희귀병 ‘모겔론스(morgellons)’병을 앓고 있는 환자들을 취재하고 이들의 고통을 상세히 옮긴 장에서 제이미슨은 번민한다.
“누군가의 고통에 대한 특정한 이해를 함께하지 않으면서 어떻게 내가 그 사람의 고통을 함께할 수 있을까? (…)
나는 전형적이었다. 이 글을 쓰는 지금, 나는 그가 배신이라 여기지 않을 만한 일을 하고 있을까?
나는 당신의 이야기를 들었어요. 다시 말해, 나는 어떠한 판단도 하지 않았어요.”
타인의 고통에 공감하는 것에 대한 작가의 고민은, 낙태와 폭행, 알코올 중독 등 개인적 경험을 털어놓는 대목을 통해
설득력을 얻는다. 당초 제이미슨이 고통과 공감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자신이 신체적 외상을 겪었기 때문이다.
하버드대 영문과를 졸업하고 아이오와 작가 워크숍에서 글쓰기를 공부하며 소설가로 작가 이력을 시작했던
제이미슨이 에세이라는 형식을 택해 공감을 얘기하는 것도 같은 이유에서다. 르포와 체험기, 문학비평과
TV 및 영화 비평 등 세부 분류는 다양하지만 모든 글에 저자의 개인적인 경험과 시선이 녹아있다.
제이미슨은 지면 발표 순서와는 달리 책이 ‘가이드를 따라가는 공감 여행이 되도록’ 재배열 했다.
마지막 장의 이름 ‘여성 고통의 대통일 이론’은 의미심장하다.
각 에세이에 등장하는 여성 개인의 고통이 결국에는 여성 일반의 고통으로 수렴되는 것으로 읽힌다.
'人文,社會科學 > 책·BOOK' 카테고리의 다른 글
[내 책을 말한다] '우리가 글을 몰랐지 인생을 몰랐나' (0) | 2019.02.06 |
---|---|
2030년엔 세계 인구의 절반 이상이 중산층 혹은 부유층 (0) | 2019.02.06 |
'0'의 개념 발명한 마야인, 말이 없어 널리 퍼뜨리지 못해 (0) | 2019.02.05 |
[남자 들여다보기 20선]<14>따로와 끼리: 남성지배문화 벗기기 (0) | 2019.02.04 |
문서 한 장 없어도… 위안부 피해자의 기억은 역사가 된다 (0) | 2019.02.0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