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일보 2019.11.11. 00:35
반독재투쟁 공적을 독점한 정권
정권반환점, 평가는 빨간색 일색
고집·고소·고립정치로 미래 실종
국가로드맵 없이 더 갈 수 있을까
그나마 믿었던 게 억울해서, 다른 대안이 없어 믿을 수밖에 없던 현실이 안타까워 하는 말이다. 국회는 그 어느 때보다 아수라장, 법안통과율은 역대 최악을 기록했다. 법안이 많이 통과돼야 반드시 좋은 것은 아니지만 입법 시기를 놓치면 악법이 된다. 20대 국회는 아예 주소지를 거리로 옮겼다. 걸핏하면 여야가 박차고 나서니 시민들도 거리투쟁이 일상이 됐다.
청와대 사저정치를 단죄한다는 그 결의가 대척점으로 이렇게 단순하게 이동할 줄 몰랐다. 청와대 참모 중 군, 관, 율사 70%였던 지난 정권과, 시민단체와 운동권이 장악한 현정권은 무엇이 다른가? 참모진이 이렇게 빈약한 정권도 없었다. 아마추어 집합소, 80년대 세계관으로 21세기를 바라보는 사시(斜視)들의 합창에 한국호(號)는 아예 표류 일보 직전, 공정과 정의는 냉소를 자아내는 어휘가 됐다.
너무 비정한 평가일까? 지금껏 정권의 모든 역량을 쏟아 부은 적폐청산으로 새로운 살이 돋았다면 틀린 평가다. 쫓겨난 자리에 내 사람을 채웠고, 관료들은 법조항 내부로 몸을 숨겼다. 그나마 권한을 가진 장관들은 청와대 수석의 수족이 됐다. 복지부, 노동부 장관은 복지예산을 결재하는 집행관, 교육부장관은 대통령의 한마디에 경기를 일으킬 듯 복창하는 앵무새, 외교부수장은 누군가 꼬집었듯 장식 인형? 실물경제 위기설이 파다한 이 험난한 계절에 경제수장은 없다. 홍남기 경제부총리는 정책분장사, 김상조 정책실장은 현실의 쓴맛을 조금 본 규제론자, 주택시장과 샅바 싸움하는 김현미 장관이 약간 돋보일 뿐인데, 이리저리 터지는 풍선효과 때문에 약발도 없다.
촛불은 열망이었다. 도시와 농촌, 산촌과 어촌에서 분출된 열망의 지류를 국가활력의 대하(大河)로 길을 트는 게 선정(善政)일 터, 촛불로 군불을 때다 만 정치였다.
작년 3월 청와대 강연, 시장의 역습을 경계해 달라고 신신당부하던 필자의 읍소를 ‘보수의 간교’로 치부하지만 않았다면 어땠을까. 현정권의 3대 비책(祕策)인 최저임금제, 주52시간노동, 비정규직 축소의 명분은 결국 부작용에 퇴색됐다. 정권의 명운이 달린 그 정책이 자칫 파산, 해고, 폐업을 몰고 올지 모른다고 말하는 사람은 청와대 내에서 반역자였다. 비책은 비수(匕首)였다. 일자리 복지에 쏟은 수십조 원, 매년 치솟는 건강보험료, 증폭되는 소득불평등은 누가 책임지는가?
진보정권이라 좀 나을 줄 알았다. 진보는커녕, 정치의 기본요건도 충족하기 버거웠다. 현정권의 기질인 ‘3고 정치’ 때문이다. 고집(固執), 고소(告訴), 고립(孤立)정치. 대선공약이 국민적 약속이라 해도 역효과가 크면 변경할 줄도 알아야 한다. 수정노선은 초기 설계에 없었다. 민심에 이상이 발생하고 비명소리가 진동해도 현정권은 꿈쩍하지 않았다. 정의를 위한 작은 희생쯤으로 여긴 저 ‘고집정치’는 민주정치의 대원칙인 ‘민감한 대응’ 의무를 몰각했다. 현실감각은 제로였다.
둘째, 집권세력은 고소로 세월을 보냈다. 속이 다 후련했던 초기의 적폐청산이 실종된 미래와 시민적 긍지를 되살려 줄 것으로 기대했다. ‘고소정치’가 서울구치소를 가득 채우고 구세력 군기잡기에는 성공했으나 끝내 미래담론을 불러들이지 못했다. 이웃 일본과 중국이 국력의 로드맵을 끊임없이 내놓는 반면 대한민국은 적폐리스트 체크에 정신이 없다. 고소정치와 미래비전은 서로 상극임을 진즉 눈치 채기는 했다.
그래도 진보정권이니 남녀노소, 선남선녀가 다 같이 의견을 개진할 공평한 멍석을 깔 줄로 기대했다. 집권당 명칭에도 ‘더불어’를 붙였으니 말이다. 멍석은커녕 진영논리로 울타리를 치고 우리와 그들을 갈랐다. 공론화는 비난회피 기제로 쓰였다. 탈원전과 입시가 선정책, 후공론화의 대표적 사례다. 전기료 인상고지서가 곧 날아들 예정이다. 며칠 전 공표한 자사고와 특목고 일괄폐지도 여의치 않으면 일괄공론화에 붙일 것이다. 일반고 전환에 쓰일 1조 5천억 원도 국민들이 십시일반 지불할 ‘고립정치’ 비용이다.
촛불 밑천을 다 까먹은 세월은 가고, 추락하는 세월이 올텐데. 후반기 2년 반, 고(固), 고(告), 고(孤)로 계속 고(go) 할 수 있을까. 아, 운 없는 대한민국.
송호근 본사 칼럼니스트·포스텍 석좌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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