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일보 2019.11.25. 00:35
일국양제, 주권과 통치권의 충돌
'다민족 제국'도 정치체제 모색 중
동아시아 평화를 위한 시험대
이웃 홍콩은? 인구 740만 명, 일인당 국민소득 6만6천 달러의 부자도시 홍콩이 화염에 휩싸였다. 민생이 아니라 민주를 향한 절규다. 페퍼포그차, 화염병, 경찰, 깨진 벽돌이 뒤엉킨 홍콩 거리는 깊숙이 파묻은 우리의 경험을 들쑤시기에 충분하다. 파이프로 무장한 시위대, 불타는 바리케이드가 독재에 맞섰던 청년 시절의 빛바랜 사진을 급히 인화한다. 섬뜩하다. 인간의 본성을 뒤바꿔 놓는 정치권력의 무서운 위력은 탄환을 발사한 경찰의 다급한 동작과 느닷없이 생명줄을 놓아야했던 청년의 피격에서 절정에 달했다. 수십 명의 사상자가 났고 300여명이 체포됐다. 당랑거철(螳螂拒轍), 거대한 대륙국가에 속절없이 달려드는 남쪽 끝 작은 식민도시의 운명은 예견 가능해서 더 서글프다.
베이징 정부는 홍콩 시위대를 폭도(riot)라 했지만 국가 전복이나 반란 의지를 가졌는지는 불분명하다. 1984년 중국과 영국 간 맺었던 반환협약을 준수해달라는 절망적 항의(protest) 정도일 거다. 한 수위 올려 항거(resistance)라 해도 군중이 보는 앞에서 경찰이 총을 발사하는 행위는 가난한 남미에서도 일어나지 않았다. 경제가 발전하면 정권의 폭력은 역으로 줄어든다. 민주화 명제다. 홍콩은 부(富)와 정치체제의 격차가 세계 최고의 도시가 됐다. 1997년 맺은 주권과 통치권의 분리협약이 흐릿해졌기 때문이다. 홍콩정부의 통치권을 50년 더 연장한다는 분리협약도 중국 본토와의 혼류를 막지 못했다. 본토와의 통합 프로젝트는 본토인의 진출과 투자를 가속화했다. 여기에 홍콩의 세금이 투여됐다. 통치권에 대한 주권의 우위가 낳은 모순과 불만은 범죄인 인도법안(송환법)에서 극대화됐다. 식민도시 홍콩의 재식민화, 도시의 삶과 성과가 중국으로 빨려 들어가는 역류(逆流)다.
서방국가와 세계 언론들은 침묵과 신중모드로 일관한다. 베이징 정부가 두렵다. 자칫하면 국정 개입이라는 지탄을 받는다. 유엔인권위는 아예 중국편에 섰다. 기껏해야 ‘상황 주시’(필리핀), 또는 ‘평화로운 방식’(독일, 영국, 프랑스)을 어눌하게 언급하는 정도인데, 미국만 예외적이다. 처음엔 폭도 운운했던 트럼프 대통령은 하원이 홍콩인권·민주주의법을 통과시키자 태도를 바꿨다. 트럼프가 홍콩에 모종의 경제제재를 가한다면 미중 무역전쟁에 또 다른 대형 악재가 터지는 셈이다.
중국은 어떤 정치학 이론도 설명하지 못하는 거대한 ‘다민족 제국’이다. 인류역사상 초유의 현상이다. 중국의 시진핑체제가 민주주의가 아니라고 냉소하는 서방의 시각은 대체로 오리엔탈리즘의 소산이다. 미국정치학자 헌팅턴은 ‘유교 민주주의’는 형용모순이라고 했지만, 문화가 아니라 거대한 영토와 인구가 더 문제다. 루소는 일찍이 정치체제와 영토, 인구의 상관관계를 말한 바 있다. 직접민주주의는 작은 규모에서 가능하고, 규모가 커지면 귀족정, 더 커지면 군주정(monarchy)이 들어선다고 했다. 인구 15억 국가는 어떨까? 중국 역시 역사상 한 번도 가보지 않은 길을 걷고 있다.
변방 50개 민족과 광활한 영토를 총괄하는 정치체제는 무엇인가? 의뭉한 철인(鐵人) 시진핑도 한무제(漢武帝)나 진시황에게 물어봐야 할 정도다. 일대일로로 뻗는 ‘중국화된 신세계’(Le Nouveau Monde Sinise)가 곧 천하(天下)일 터, 그것이 ‘다민족 국민국가’인지, ‘제국적 복합국가’인지를 말이다. 세계문명이 깃드는 천하, 온갖 새들이 부화하는 조소(鳥巢)에서 홍콩은 무엇인가? 중국도 암중모색 중이다.
일국양제(一國兩制)는 21세기 ‘신제국’으로 건너는 임시 가설 다리에 불과하다. 구룡반도 작은 도시가 외치는 민주와 자치 단말마는 신제국 프로젝트에서 이룰 수 없는 꿈인가. 작은 둥지에서 꿈을 이뤘던 한국 청년들은 열렬한 지지를 표명 중인데, 7만 중국 유학생들의 심기는 불편하다. 대자보에 ‘One China’란 낙서가 휘갈겨지고, ‘쬐끄만 나라가 웬 훈수?’ ‘입 닥쳐!’라는 경고도 등장했다. 그러나 ‘쬐끄만 도시’의 고통과 미학을 거칠게 다루는 거인의 신제국은 여전히 전제정에 호소한다는 루소적 명제가 새삼스럽다.
지구지역적(glocal) 관점에서 ‘동아시아’는 중국·한국·일본이 가꿔가는 문명적 생활공간이다. 한국과 일본이 하나마나한 멘트를 날리고도 동아시아의 균세와 평화가 이뤄진다고 믿는 사람은 없다. 누가 홍콩을 두려워하랴. 그러나 정작 두려워할 것은 홍콩의 절규를 두려워하지 않는 동아시아인의 위축된 방관이다.
송호근 본사 칼럼니스트·포스텍 석좌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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