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일보 2020.02.12. 03:14
[바이킹의 나라]
10세기말 아이슬란드, 그린란드 거쳐 北美에 식민지 건설
스톡홀름 서쪽 섬엔 6세기 인도 불상 나와… 그들의 활동 반경은?
- 부처님은 어떻게 스웨덴에 왔나
선사시대부터 스칸디나비아人들 멀리 인도까지 교류한 흔적… 8세기부터 돌연 난폭해져 약탈
- 머리 잘라 막대에, 두개골에 술을
793년 최초로 英 수도원 습격… 노르만 왕조 세우고 지중해 진출… 北美 대륙선 캐나다 인디언 만나
- 인구 8%가 해외로… '바이킹 현상'
인구 과잉 등으로 농토 부족하자 길이 6~20m 배에 수십명 타고 비잔틴 제국·러시아까지 누벼
1950년대에 스웨덴 스톡홀름 서쪽 멜라렌(Mälaren)섬에 위치한 헬괴(Helgö)에서 발굴하던 고고학자들은 놀라운 유물들을 찾아냈다. 그중에는 6세기에 인도 북부에서 만들어진 작은 불상도 있다. 부처님은 어떤 연유로 이 먼 곳까지 오게 되었을까? 연구자들은 아마도 아시아에서 찾아온 어느 여행자가 안전을 기원하느라 이 불상을 일종의 수호신으로 지니고 다녔을 것으로 본다. 헬괴에서는 또한 이집트의 콥트(기독교 일파) 교도가 사용한 세례용 국자, 아일랜드의 주교 지팡이, 동로마제국의 금화(solidi)도 대량으로 출토되었다. '성스러운 섬'을 뜻하는 헬괴는 기독교 이전 이교(異敎)의 중심지이자 동시에 상품 거래 중심지였다. 유럽 북단의 스칸디나비아와 발트해 연안 지역은 고립된 곳이 아니었으며, 아주 이른 시기부터 유라시아 대륙 내 광범위한 원거리 교류 네트워크에 포섭되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미 선사시대부터 스칸디나비아 지역은 다른 지역과 문화적·경제적 접촉을 해 왔다. 이곳에서 발견되는 청동 재료와 청동기 제품은 멀리 중부 유럽과 영국에서 들어온 것들이다. 대신 가죽, 모피 같은 특산물을 수출했을 것이다. 북유럽 산물 중 가장 유명한 것은 호박(琥珀)이다. 고대 이집트인들이나 로마인들 모두 발트 지역에서 나는 호박 제품을 좋아해서 상인들이 북유럽 지역을 돌아다니며 수집했다. 터키 남부 울루부룬(Uluburun) 근처 바다에서 발견된 기원전 14세기의 침몰선에서 호박 제품이 나왔다는 사실이 그런 점을 말해 준다.
스웨덴에서 발견된 인도 6세기 불상
오랜 기간 비교적 평화로운 교류를 하던 시기가 마감되고 서기 8세기 중엽부터 스칸디나비아인들이 돌연 폭력적으로 해외로 나가는 바이킹의 시대가 시작된다. 처음에는 이웃 지역으로 배를 타고 가서 약탈하고 돌아오는 방식이었다가, 점차 현지에 정착하여 식민지를 건설하거나 극히 먼 지역까지 찾아가서 교역을 하는 식으로 발전했다. 얼마나 많은 사람이 해외로 나갔는지 정확한 통계를 구하기는 힘들다. 노르웨이 지역에 대한 연구 결과를 보면 전체 인구의 8% 정도가 해외로 나갔으리라 추산한다. 8%라면 결코 낮은 숫자가 아니다. 왜 그렇게 많은 사람이 갑자기 바다로 나갔을까? 이 또한 정확한 답을 구하기는 힘들다. 인구 과잉과 그에 따른 농토 부족이 원인이었을 수도 있고, 호전적 엘리트 집단 간의 갈등이 있었으리라 추측하기도 하지만 결정적인 증거는 찾을 수 없다.
이미 선사시대부터 스칸디나비아 지역은 다른 지역과 문화적·경제적 접촉을 해 왔다. 이곳에서 발견되는 청동 재료와 청동기 제품은 멀리 중부 유럽과 영국에서 들어온 것들이다. 대신 가죽, 모피 같은 특산물을 수출했을 것이다. 북유럽 산물 중 가장 유명한 것은 호박(琥珀)이다. 고대 이집트인들이나 로마인들 모두 발트 지역에서 나는 호박 제품을 좋아해서 상인들이 북유럽 지역을 돌아다니며 수집했다. 터키 남부 울루부룬(Uluburun) 근처 바다에서 발견된 기원전 14세기의 침몰선에서 호박 제품이 나왔다는 사실이 그런 점을 말해 준다.
스웨덴에서 발견된 인도 6세기 불상
오랜 기간 비교적 평화로운 교류를 하던 시기가 마감되고 서기 8세기 중엽부터 스칸디나비아인들이 돌연 폭력적으로 해외로 나가는 바이킹의 시대가 시작된다. 처음에는 이웃 지역으로 배를 타고 가서 약탈하고 돌아오는 방식이었다가, 점차 현지에 정착하여 식민지를 건설하거나 극히 먼 지역까지 찾아가서 교역을 하는 식으로 발전했다. 얼마나 많은 사람이 해외로 나갔는지 정확한 통계를 구하기는 힘들다. 노르웨이 지역에 대한 연구 결과를 보면 전체 인구의 8% 정도가 해외로 나갔으리라 추산한다. 8%라면 결코 낮은 숫자가 아니다. 왜 그렇게 많은 사람이 갑자기 바다로 나갔을까? 이 또한 정확한 답을 구하기는 힘들다. 인구 과잉과 그에 따른 농토 부족이 원인이었을 수도 있고, 호전적 엘리트 집단 간의 갈등이 있었으리라 추측하기도 하지만 결정적인 증거는 찾을 수 없다.
바이킹이 사용한 배에 대한 연구도 많이 진척되었다. 항해 중에 침몰한 배, 혹은 권력자가 죽었을 때 장례용으로 침몰시킨 배를 건져내서 연구하는 해양고고학 덕분에 당시의 선박과 항해뿐 아니라 사회와 경제, 문화 일반에 대해 많은 것이 알려졌다. 대표적인 것으로는 노르웨이의 곡스타드(Gokstad)에서 건져 올린 배를 들 수 있다. 길이 23.80m, 폭 5.1m 크기에 110㎡의 돛을 달고 32명이 노를 젓는 이 배는 현재 보존된 바이킹 선박 중 가장 큰 편에 속한다. 이 배는 전투, 교역, 사람과 상품 이송에 두루 사용할 수 있었다. 19세기 말에 똑같이 복제한 '바이킹' 호로 노르웨이의 베르겐을 떠나 시카고까지 항해하는 데 성공하여 바이킹 시대에 북아메리카까지 오가는 항해가 충분히 가능하다는 결론을 얻었다.
한편 발트해를 넘어 러시아와 비잔틴 방향으로 가는 배는 작고 가벼운 보트로서 강이나 호수 위를 오가는 용이었다. 러시아의 강을 타고 내려가다가 강이 끊어지거나 폭포를 만나 더 이상 항행이 불가능할 때에는 다음 수로를 만날 때까지 배를 들거나 끌어서 옮기는 연수육로(連水陸路·portage) 방식으로 이동해야 했으므로, 이런 배들은 길이 6~8m 정도의 소형이었다. 1980년대 후반 고틀란드섬의 팅스태데(Tingstäde)에서 발견된 배를 복제해서 실험 항행을 한 적이 있는데, 약 3개월 걸려 러시아의 강을 따라 내려간 후 이스탄불에 무사히 도착함으로써 바이킹의 남동쪽 모험 가능성 역시 확인되었다.
아메리카에도 식민지 건설한 바이킹
한편 발트해를 넘어 러시아와 비잔틴 방향으로 가는 배는 작고 가벼운 보트로서 강이나 호수 위를 오가는 용이었다. 러시아의 강을 타고 내려가다가 강이 끊어지거나 폭포를 만나 더 이상 항행이 불가능할 때에는 다음 수로를 만날 때까지 배를 들거나 끌어서 옮기는 연수육로(連水陸路·portage) 방식으로 이동해야 했으므로, 이런 배들은 길이 6~8m 정도의 소형이었다. 1980년대 후반 고틀란드섬의 팅스태데(Tingstäde)에서 발견된 배를 복제해서 실험 항행을 한 적이 있는데, 약 3개월 걸려 러시아의 강을 따라 내려간 후 이스탄불에 무사히 도착함으로써 바이킹의 남동쪽 모험 가능성 역시 확인되었다.
아메리카에도 식민지 건설한 바이킹
바이킹이라 하면 대체로 바다를 가로질러 해안 지역으로 습격해 들어가서 약탈·방화·살인을 저지른 후 도주하는 건장한 야만인을 떠올린다. 대략 8~9세기에, 특히 영국과 프랑스 지역을 공격할 당시에는 이런 이미지가 완전히 틀린 것은 아니다. 최초의 약탈 행위 사례로 꼽히는 사례가 793년 영국 북동 해안의 린디스판섬 수도원 공격인데, 이 당시 만행은 앵글로색슨 연대기에 잘 나와 있다. 살해한 사람 머리를 잘라 꼬챙이 꿰어서 들고 다니는 정도니 당시 영국인들은 말세에 이르러 북쪽의 악마들이 용과 함께 들이닥친 것이라고 해석했다. 북유럽 사람들이 술 마실 때 건배사로 사용하는 '스콜'이라는 말은 바이킹들이 적의 두개골(skull)에 술을 따라 마시는 데에서 유래했다고 이야기하곤 하지만 사실 여부는 불확실하다.
바이킹의 약탈적 성격을 부인할 수 없지만 그렇다고 이들을 단순히 폭력적인 침략자 정도로 보는 것은 너무 단순한 이해 방식이다. 바이킹의 활동 상황을 총체적으로 파악하면 이보다 스케일이 훨씬 장대하고, 팽창의 방향도 다채로우며, 단순히 약탈 행위만 한 것이 아니라 매우 복합적인 활동을 했음을 알 수 있다. 8세기 중반부터 11세기 중반까지 약 300년에 이르는 소위 '바이킹의 시대'에 이들의 팽창은 크게 세 방향으로 진행되었다. 남서쪽 방향으로는 영국, 프랑스 해안을 침략하다가 시간이 갈수록 그 범위가 확대되어 지중해까지 이르렀다. 북서쪽 방향으로는 아이슬란드, 그린란드를 거쳐 아메리카 대륙에 상륙하여 한때 그곳에 식민지를 건설한 적도 있다(콜럼버스보다 500년 정도 앞선다). 남동쪽으로는 러시아를 넘어 비잔틴 제국에 이르렀고, 어쩌면 아라비아, 심지어 인도와 중국에까지 도달했을 가능성을 거론하는 학자도 있다. 이런 과정에서 프랑스 서부 해안 지역에 정착하여 노르망디(Normandie) 주가 형성되었고, 이들이 영국을 점령해서 노르만 왕조를 개창했다. 시칠리아와 이탈리아 일부 지역을 점령하여 새 왕조를 열고, 지중해 동부 지역에까지 심대한 영향을 미쳤다. 러시아의 국가 건설 과정에도 바이킹들이 깊이 간여한 것으로 보인다. 바이킹 현상은 우리가 통상적으로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거대한 움직임이었다. 앞으로 이 사건들을 차례로 살펴보도록 하자.
["갓난아이를 바다에 던져버린다"]
"이곳은 세계 대양의 맨 끝에 위치해 있는 큰 도시이다. 시내에는 맑은 물이 나오는 우물이 있다. 이곳 주민들은 시리우스 별을 숭배하지만 소수 기독교도가 있어서 따로 교회를 유지하고 있다. 신께 희생 동물을 바치려는 사람은 문 앞에 장대를 꽂고 그 위에 자기가 잡은 소, 양, 염소, 돼지 같은 동물을 꽂아서, 이웃 사람들이 그런 사실을 알도록 한다. 이곳에는 재산이나 보물이 많지 않다. 주민들의 주요 식량인 생선은 아주 풍부하게 잡힌다. 사람들은 경제적인 이유 때문에 갓난아이를 키우기보다 흔히 바다에 던져버린다. 이혼할 권리는 여자들에게 있다. 그리고 한 가지 더 말할 사항이 있다. 나는 이곳 사람들보다 노래를 못하는 사람들을 본 적이 없다. 이들이 하는 노래는 목구멍에서 끄집어내는 툴툴거리는 소음인데, 개 짖는 소리와 비슷하지만 개 소리보다도 더 짐승 같다."
바이킹의 약탈적 성격을 부인할 수 없지만 그렇다고 이들을 단순히 폭력적인 침략자 정도로 보는 것은 너무 단순한 이해 방식이다. 바이킹의 활동 상황을 총체적으로 파악하면 이보다 스케일이 훨씬 장대하고, 팽창의 방향도 다채로우며, 단순히 약탈 행위만 한 것이 아니라 매우 복합적인 활동을 했음을 알 수 있다. 8세기 중반부터 11세기 중반까지 약 300년에 이르는 소위 '바이킹의 시대'에 이들의 팽창은 크게 세 방향으로 진행되었다. 남서쪽 방향으로는 영국, 프랑스 해안을 침략하다가 시간이 갈수록 그 범위가 확대되어 지중해까지 이르렀다. 북서쪽 방향으로는 아이슬란드, 그린란드를 거쳐 아메리카 대륙에 상륙하여 한때 그곳에 식민지를 건설한 적도 있다(콜럼버스보다 500년 정도 앞선다). 남동쪽으로는 러시아를 넘어 비잔틴 제국에 이르렀고, 어쩌면 아라비아, 심지어 인도와 중국에까지 도달했을 가능성을 거론하는 학자도 있다. 이런 과정에서 프랑스 서부 해안 지역에 정착하여 노르망디(Normandie) 주가 형성되었고, 이들이 영국을 점령해서 노르만 왕조를 개창했다. 시칠리아와 이탈리아 일부 지역을 점령하여 새 왕조를 열고, 지중해 동부 지역에까지 심대한 영향을 미쳤다. 러시아의 국가 건설 과정에도 바이킹들이 깊이 간여한 것으로 보인다. 바이킹 현상은 우리가 통상적으로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거대한 움직임이었다. 앞으로 이 사건들을 차례로 살펴보도록 하자.
["갓난아이를 바다에 던져버린다"]
"이곳은 세계 대양의 맨 끝에 위치해 있는 큰 도시이다. 시내에는 맑은 물이 나오는 우물이 있다. 이곳 주민들은 시리우스 별을 숭배하지만 소수 기독교도가 있어서 따로 교회를 유지하고 있다. 신께 희생 동물을 바치려는 사람은 문 앞에 장대를 꽂고 그 위에 자기가 잡은 소, 양, 염소, 돼지 같은 동물을 꽂아서, 이웃 사람들이 그런 사실을 알도록 한다. 이곳에는 재산이나 보물이 많지 않다. 주민들의 주요 식량인 생선은 아주 풍부하게 잡힌다. 사람들은 경제적인 이유 때문에 갓난아이를 키우기보다 흔히 바다에 던져버린다. 이혼할 권리는 여자들에게 있다. 그리고 한 가지 더 말할 사항이 있다. 나는 이곳 사람들보다 노래를 못하는 사람들을 본 적이 없다. 이들이 하는 노래는 목구멍에서 끄집어내는 툴툴거리는 소음인데, 개 짖는 소리와 비슷하지만 개 소리보다도 더 짐승 같다."
10세기 후반 코르도바 출신의 여행자 알 타르투시(Al-Tartushi)가 슐레스비히 남쪽의 헤데비(Hedeby)에 대해 남긴 기록이다. 헤데비(독일어 자료에서는 하이타부(Haithabu)라는 이름으로 더 많이 알려져 있다)는 상당히 중요한 역할을 하는 바이킹 중개 도시였지만, 이보다 훨씬 부유하고 세련된 지역 출신인 알 타르투시가 보기에는 만족스럽지 않았던 것 같다. 고고학적 발굴 결과를 보면 성채로 둘러싸인 시 면적은 최대 24㏊이고 인구는 약 1500명 정도로 추산되니 실제 규모는 마을 수준이다. 그의 생생한 서술 내용으로 판단해 보건대, 헤데비의 주민 대부분은 이교 신앙을 가지고 있었으나 기독교 전도가 막 시작되었으며, 원시적인 인구 조절법인 기아(棄兒) 풍속을 가지고 있었다.
주경철 서울대 서양사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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