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일보 2020.02.12 이한우 논어등반학교장)
율곡 이이는 7세 때 '진복창전(陳復昌傳)'이라는 짧은 평전을 썼다.
어떤 인물이길래 일곱 살 소년이 전기까지 썼을까?
진복창은 조선 중종 30년(1535년) 문과에 장원급제했다. 이어 불과 4년 만에 정4품에 해당하는 사헌부
장령에 올랐다. 그러나 중종 말년까지 더 이상 진급은 하지 못한 채 한직이나 지방직을 떠돌았다.
실록은 그의 인품을 이렇게 평하고 있다. "사람됨이 경망스럽고 사독(邪毒)하다."
그가 죽었을 때 사관은 그를 '독사(毒蛇)'라고 적었다. 율곡이 전기를 쓴 것이 중종 37년이다.
그에 관한 평판을 듣고 그런 인간이 되지 않겠다는 어린 소년의 다짐이 그런 글을 쓰게 만들었을 것이다.
중종이 죽고 인종에 이어 아들 명종이 왕위에 오르자 외삼촌 윤원형이 권력을 휘둘렀다.
진복창은 윤원형의 심복으로 억눌린 한을 풀고 보복에 나선다.
윤원형 세력이 일으킨 을사사화 직후인 1545년 부평부사에서 중앙으로 복귀했는데 여전히 직위가 장령이었다.
그동안 얼마나 이를 갈고 절치부심했을까. 진복창은 임금을 향해 농간을 부리는 급은 아니지만 실권자를 등에 업고
설치는 '조폭 행동대장'형 간신의 전형이라 하겠다.
사간원과 사헌부를 오가며 정적을 비롯해 당시의 뛰어난 신하들을 가차 없이 내쫓았다.
이런 공을 인정받아 승승장구해 마침내 대사간과 대사헌에 오른다. 이 과정에서 배신(背信)도 밥 먹듯이 한다.
자신을 장령으로 천거했던 이조판서 허자(許磁)를 제거하는 데 앞장섰고, 한때 자기 뒤를 봐주던 권간(權奸)
좌의정 이기(李芑)가 윤원형의 견제를 받자 그를 배척하는 데 힘을 쏟았다.
젊은 신하들을 중심으로 반(反)진복창 움직임이 거세게 일어났다.
조선의 대표적 암군(暗君)이었던 명종은 "진복창은 강직하고 나라를 위하는 신하"라고 감싸려 했다.
윤원형은 계속 진복창을 옹호하다가는 자기 누나 문정왕후(명종의 어머니)까지 위태로워질 것으로 판단해
진복창을 삼수로 유배 보낸다. 과유불급(過猶不及)을 모르는 간신의 불행한 결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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