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일보 2020.02.14. 23:45
비행기 납치는 테러리스트만이 아니라 조종실에서 비롯될 수도..
서른네 살에 비행기를 처음 타봤다. 제주행 비행기였다. 체공(滯空) 시간이라 해야 40분 남짓이니 탑승 소감이랄 것도 없었다. 이륙(離陸)할 때 착륙할 때 속이 울렁거려 의자 팔걸이를 꽉 붙들었다는 기억뿐이다. 늦깎이라서 그럴까. 그로부터 40년이 흘렀는데도 이륙과 착륙 순간 저절로 온몸이 굳어진다.
알고 보니 이·착륙 울렁증이 반드시 늦깎이 탓은 아니었다. 자연스럽고 과학적인 심신(心身) 반응이었다. 비행시간 비율로 치면 이·착륙에 소요되는 시간은 전체 비행시간의 6% 정도지만 항공 사고의 70%가 이 두 단계에서 발생했다. 이·착륙 단계 사고의 65%가 착륙 과정에서, 나머지 35%가 이륙 과정에서 발생한다고 한다.
1948년 독립해 나라를 세웠으니 대한민국 나이도 올해 일흔둘이다. 한국이 갓 태어났을 때 이렇게 긴 세월을 견뎌내리라고는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다. 패전(敗戰)으로 현해탄(玄海灘)을 건너 철수하던 일본인 상당수는 머지않아 되돌아올 날이 오리라고 믿었다. 중국인들은 한반도 전체의 공산화가 역사의 대세라고 생각했다. 미국에 대한민국은 귀찮은 짐 덩어리였다. 어느 미국 전후(戰後) 외교 설계자는 일본에 '무조건 항복'을 강요한 실책(失策) 탓에 한반도에서 일본 대신 냉전의 최전선(最前線)에 서게 됐다고 후회했다.
36년 동안 지도에서 사라졌던 나라를 다시 세우는 일은 비행기를 이륙시키는 것에 비교할 일이 아니다. 수백 배 어렵다. 경험도 기술도 돈도 없었다. 배고픈 2000만 국민밖에 없었다. 울타리 밖은 소련·중공 등 온통 붉은 천지였다. 대한민국 건립자(建立者)들은 이 상황에서 나라를 세웠다.
봉건시대엔 나라를 창업(創業)한 인물을 태조(太祖)라고 불렀다. 한국과 중국 왕조(王朝) 변천사에는 태조만 있고 다음 왕이 없는 나라가 숱하다. 궁예로 끝난 후고구려, 견훤으로 끝난 후백제도 그렇다. 나라가 이어지려면 태조를 이어 나라의 기반을 넓히고 굳히는 '태종(太宗)과 세종(世宗)' 그리고 쇠퇴하는 나라에 새 기운(氣運)을 불어넣는 '세조(世祖)'라는 후계자가 나와야 한다. 대한민국이 '초대 대통령'으로 끝나지 않고 오늘에 이른 것은 나라의 기반을 넓히고 나라 분위기를 일신(一新)해서 새 숨결을 불어넣은 후계 대통령들과 그 시대 국민의 노고(勞苦)가 뒤따랐기 때문이다. 이것이 창업과 수성(守成)의 역사관이다.
문재인 정권 출범 2년 9개월 내내 나라가 요동쳤다. 국민은 두 쪽이 났다. 세계는 냉전과 공산권 붕괴 이후 미·중 각축(角逐)이라는 세 번째 전환기를 맞고 있다. 만만치 않은 상황인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 어려움을 나라를 세우고 지켜낸 '창업과 수성'의 어려움에 비길 수는 없다. 문 대통령이 비행기를 이륙시키는 것도 착륙시키는 것도 아니다. 이륙 과정을 마친 비행기는 조종간(操縱杆)만 바로 쥐고 있어도 운항(運航)할 수 있다. 기체(機體)가 요동치고 탑승객들이 불안을 삼켜야 하는 것은 조종사가 쓸데없이 급상승과 급강하(急降下)를 되풀이하기 때문이다.
지금의 민간항공기는 조종석과 탑승자 좌석이 완벽하게 차단돼 있다. 테러리스트들이 조종실에 침입해 비행기를 납치하는 사태를 방지하기 위해서다. 겪어 보니 그것도 문제다. 테러리스트가 비행기를 납치하는 경우만 생각했지 그 반대 상황은 염두에 두지 않은 기체 설계다.
현재의 혼란과 소동은 거의 전부가 조종실 내부에서 비롯됐다. 항로(航路) 이탈은 조종 미숙으로 볼 선(線)을 많이 넘어섰다. 안보와 경제가 어디로 가는지 알 도리가 없다. 조종실 문이 잠겨 있어 물을 수도 항의할 수도 없다.
울산 시장 선거 불법 개입 혐의로 기소된 사람 대부분이 전(前) 현직(現職) 청와대 비서관들이다. 유재수 감찰 무마 사건의 등장인물도 전부가 대통령 사람들이다. 대통령과 법무장관이 변호사·판사 출신이니 헌법과 법률의 탄핵 관련 조항을 들춰보면 뭔가 판단이 설 것이다. 헌법에 없는 공수처가 최고 수사권을 갖는 것이 합헌(合憲)인지 여부도 같이 살펴보기 바란다.
'태조가 없는 나라'나 '태종과 세종과 세조가 그 뒤를 받쳐주지 않는 나라'는 존재할 수 없다. 그런 근본 없는 나라가 어떻게 바로 설 수 있겠는가. 문재인 정권의 오늘은 대한민국 역사 부정(否定)에 뿌리를 두고 있다. 오는 4월 15일은 요동치는 비행기가 중간 기착(寄着)하는 날이다. 국민의 탄환(彈丸)은 표(票)다. 표가 탄환이라고 아는 국민이 나라와 민주주의를 지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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