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일보 2020.03.11 주경철 서울대 서양사학과 교수)
[마르티그 시의 교훈]
1720년 10월 "주민들 불안해한다" 의사들 사체 파묻고 상부에 거짓보고
봉쇄 푼 市들 초토화… 초소까지 설치한 3개월 감시 수포로
- "우리는 개보다 더 서로에게 잔인해졌다"
중동 배 입항 후 마르세유 지옥되자 인근 마르티그市, 의회 즉각 소집
교역 중단하고 외부인 철저히 차단
- 식량 징발하고 병원까지 확보했지만…
의사·약사 등 12명 위생委가 총괄… 사체 운반 담당 '까마귀 팀'까지 운용
결정적 실수는 소통·투명성 부재
질병은 생물학적 현상이자 동시에 사회적·정치적·심리적 현상이다. 많은 사람의 생명과 건강을 위협하는
심대한 위기가 닥치면 그동안 감추어져 있던 사회의 내면이 백일하에 드러난다.
사회 계층 문제가 얼마나 심각한가, 정치 엘리트는 과연 합리적으로 문제를 해결할 능력을 갖추고 있는가,
그리고 총체적으로 해당 사회의 품격이 어느 수준인가 하는 점들이 비로소 눈에 보인다.
끔찍한 병마 앞에서 인간 사회가 얼마나 초라하게 무너지는지 보여주는 과거 사례는 차고 넘친다.
페스트가 발병한 1665년, 영국의 문인 새뮤얼 펩스는 "이 병 때문에 우리는 개보다 더 심하게
서로가 서로에게 잔인해졌다"고 일기에 썼다.
그렇지만 최선의 노력을 기울이며 질병과 싸우고, 또 후대를 위해 정직한 기록을 남긴 사례도 있다.
18세기 프랑스 남부 프로방스 지방에 페스트가 발병했을 때 시 당국의 대응을 꼼꼼히 기록해 둔 마르티그
(Martigues)라는 소도시가 그런 사례다.
방역 실패 원인을 기록으로 남긴 도시
1720년 5월 25일, 중동 지역에서 떠나온 배 한 척이 페스트균에 오염된 직물을 싣고 마르세유항에 입항했다.
위험 선박의 격리 기간을 너무 짧게 설정하고 시의 봉쇄를 너무 늦게 결정한 것이 결정적 실수였다.
곧 심각한 페스트가 발병하고 이웃 지역으로 퍼져 나가 2년 동안 프로방스 지방 인구 전체의 3분의 1에 해당하는
12만명이 사망하는 엄청난 피해를 보았다. 마르세유의 길거리에는 반쯤 썩고 개들이 물어뜯은 시체들이 가득 차
있었다고 하니, 그야말로 한 편의 지옥도가 펼쳐졌다.
마르세유 북서쪽에 있는 소도시 마르티그 또한 이 엄청난 시련에 맞서 최선의 방책을 강구해야 했다.
마르세유에 살던 프랑스 화가 미셸 세르가 1720년에 흑사병이 창궐한 장면을 그린 '마르세유의 흑사병'.
당시 불과 2년 만에 프로방스 전역에 전염병이 퍼졌고, 인구의 3분의 1에 해당하는 12만명이 사망했다. /위키피디아
아직 마르세유 이외 지역에서는 페스트가 발병하지 않았던 1720년 7월,
프로방스 지사 카르댕 르브레는 각 지역 대표를 불러 전염병 확산을 막는 조치를 공동으로 취하도록 하고,
예방 조치 시행에 필요한 자금을 분배했다. 인구 6000명이었던 마르티그시도 3만 리브르를 수령했다.
시 의회는 7월 31일 첫 회의를 소집하고 필요한 예방 조치를 체계적으로 결정해 나갔다.
제일 먼저 시내의 식량 사정을 조사하여 징발하는 조치를 취했다.
마르세유와의 교역을 중단시키고, 외지인의 유입을 막기 위해 초소를 설치하여 감시를 강화했다.
비상시에 환자를 유치하고 사체를 매장할 수 있도록 병원 건물을 확보하고 여기에 필요한 인력과 재원도 조사해 두었다.
그다음에 의사, 약사, 회계관리인 등 12명으로 위생위원회를 구성해서 전염병 관련 사무에 관한 최종 권위를 부여했다.
위원회는 얼굴과 온몸을 감싸는 방역 특수 의상을 입고 일해서 '까마귀(corbeau)'라는 별명으로 불리던 사체 운반인도
통솔하고 있었다. 또한 시의 중요 직책을 맡았던 사람 중 시골로 피신한 사람들에게 자기 직무에 복귀하도록 명령했다.
14세기 유럽을 강타한 페스트로 수많은 사람이 목숨을 잃고 한꺼번에 장례를 치르는 모습을
묘사한 그림(벨기에 왕립 미술관 소장). /위키피디아
이상의 내용을 보면 지금부터 300년 전에 지방의 한 소도시가 취했던 위기관리 조치치고는 모범 사례라 할 만큼
잘 대응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런 조치에도 결국은 전염병을 완전히 막아내지 못하고 큰 피해를 보았다.
무엇이 잘못되었을까?
언젠가 전염병은 또 온다
연구자들은 위기관리의 주요 요소 중 하나인 정보 소통에서 문제가 발생한 것으로 판단한다.
주민들에게 필요한 정보를 이른 시일 안에 정확하게 전달하는 지점을 확보했어야 한다.
아마도 성당이 그런 기능을 할 수 있는 곳일 텐데, 판단 실수로 성당을 폐쇄해 버렸다.
그 결과 주민들이 어떻게 대응해야 하는지 명확한 지시를 받을 수 없었고,
이런 상황에서 거짓 정보와 왜곡된 사실들이 돌았다.
17세기 유럽에서 흑사병 치료를 한 의사 '닥터 슈나벨 폰 롬'.
감염 방지를 위해 새부리 가면을 쓰고 길고 검은 겉옷을
입었다. /위키피디아
의사들은 주민들을 공연히 공포에 떨지 않도록 한다는
의도로 전염병 발생 사실을 오랫동안 숨겼고,
페스트로 죽은 사체를 '자연사'로 이야기했으며,
그런 사체를 밤에 몰래 매장했다.
투명성 부족이 처참한 결과를 가져왔다.
그해 10월 29일, 마르티그시의 보고를 그대로 믿은
상위 기관에서 마르티그와 다른 지역 간 교역을 허락했다.
이웃 시에서 의심의 눈길을 거두지 않았으나 결국 봉쇄가
풀렸고, 그 결과 페스트균이 광범위하게 퍼져갔다.
이 병이 공식적으로 종식된 것은 다음 해인 1721년 6월에
가서의 일이다. 이때까지 마르티그 주민 중 3분의 1이 넘는
2150명이 사망했다.
마르티그시는 방역에 실패했지만, 대신 이 사태에 대한
꼼꼼한 기록을 남겼다. 1723년, 시 당국은 프로방스
지사에게 그 열두 달 동안 일어난 모든 일을 가감 없이
솔직하게 기록한 보고서를 보냈다.
그들이 저지른 판단 실수,
1720년 10월의 결정적 시기에 주저하고 대책을 시행하지
않은 사실 등을 솔직하게 적었다.
보고서는 "다음 세대 사람들에게 경고를 주고 우리 의견을 전하여 다음에는 현명한 조치를 취하도록" 하는 게 목적임을
분명히 밝히고 있다. 과연 그 기록은 차후 예방 조치를 위한 좋은 참고 자료가 되었고, 훌륭한 역사 자료가 되었다.
우리 사회를 덮친 병마는 언젠가 종식될 테지만 앞으로 또 다른 전염병이 닥쳐올 가능성이 얼마든지 있다.
그에 대비하기 위해 이번 사태를 잘 고찰하고 기록을 남겨둘 필요가 있다.
한편으로 헌신적인 의사·간호사·공무원들이 숭고한 희생을 치르며 싸웠고, 끔찍한 전염병에 시달리면서도
대구 시민들은 의연하게 대처해 나갔지만, 다른 한편에서는 마스크 매점매석으로 돈 벌려는 소인배들이 넘쳐나고,
할 말 못할 말 못 가리고 흰소리 내뱉는 인사들도 한가득하며, 이 험난한 판국에 알량한 정치 싸움이나 이미지 관리에
목매는 무능한 정치꾼이 득시글거렸던 상황을 후손들에게 꼭 알려주도록 하자.
[도망친 부자들, 실험용 하녀를 먼저 보내 살아남으면 귀가] 페스트 창궐 때 피렌체 근처 별장으로 피신한 남녀들 간 대화를 모은 보카치오 소설 '데카메론'(1351년).
사람들을 공격하고 부자들을 면제해 준다." 사르트르의 이 말은 지난 과거에 거의 언제나 타당했다. 발병 소식이 전해지면 부자들은 황급히 다른 지역에 준비해둔 저택으로 도주했다. '데카메론'은 페스트가 창궐하던 때 피렌체 근처의 한 별장으로 피신한 부잣집 선남선녀 간의 대화를 모은 형식으로 되어 있다. 16세기 아비뇽의 부유한 시민은 시골에 사는 차지인과 맺은 임대계약서에 만일 전염병이 돌면 "방 하나를 나에게 빌려주며 내 말들을 마구간에 들여놓도록 한다"는 조항을 써놓았고, 병이 돌자 실제 그렇게 했다. 1664년 런던에서 페스트가 창궐하자 국왕의 궁정이 옥스퍼드로 떠났고 부유한 계층 사람들이 그 뒤를 쫓았다. 법률가들이 모두 시골로 내려갔기 때문에 재판이 한 건도 열리지 않았다. 1580년 아비뇽에서 도주한 사람 중에는 아르마냐크 추기경도 있었다. 그곳 시민이 일기에 이렇게 썼다. "그는 복음서의 내용과 다른 말을 할 수 있으리라, 나는 목자이나 내가 양을 알아보지 못하노라." (원래 내용은 '나는 좋은 목자이니 내가 양을 알아보노라', 요한복음 10:14) 보르도 시장이었던 몽테뉴도 가족들을 데리고 6개월 동안 타지로 돌아다녔는데, "우리 가족이 나타나면 친구들이 겁을 먹고, 가는 곳마다 공포를 불러일으켰다." 질병이 끝난 후에도 아직 안심할 수 없을 때, 사부아의 부자들은 가난한 '실험용 여자(essayeuse)'를 몇 주 동안 살아보게 하여 위험이 없다는 것을 확인한 후 집으로 돌아갔다. 폐쇄된 도시에는 가난한 사람들만 남았다. 1637년 피렌체는 바리케이드를 한 집, 통행금지된 도로에 식량 보급 임무를 수행하는 사람과 사제들, 그리고 인정사정없는 파수꾼들만 돌아다니는 죽은 도시였다. 1656년 제노바 시내에는 너무 많은 시체가 길거리에 쌓이고 있는데, 달리 처리할 방법이 없었기 때문에 시체를 배에 싣고 먼바다로 나가서 통째로 태워버렸다. 1523년 파리의 페스트 역시 가난한 사람들을 공격해서, 당시 기록에 의하면 "전염병 이전에 돈 몇 푼 받고 짐 나르던 사람들이 매우 많았는데 이제는 거의 볼 수 없다"고 했다. 악마는 맨 뒤에 처진 사람들부터 잡아먹는 법. 그렇지만 능력 있는 정부, 품격 있는 사회라면 뒤에 남은 사람들부터 지켜주어야 마땅하다. |
출처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20/03/10/2020031003823.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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