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일보 2020.03.16 허윤희 기자)
['창덕궁, 왕의 마음을 훔치다' 낸 신희권 교수]
사라진 부용정 꼭대기의 절병통·고향에 돌아온 와룡매 사연 등 창덕궁관리소장 지내며 알게된
우리가 몰랐던 이야기 책에 담아 창덕궁에 봄이 왔건만 예년의 봄이 아니다.
다음 달 열려야 할 '창덕궁 달빛 기행'은 우한 코로나 여파로 취소됐다. 묶인 발 대신 스토리 여행을 떠나본다.
최근 '창덕궁, 왕의 마음을 훔치다'를 펴낸 신희권 서울시립대 교수가 '우리가 몰랐던 창덕궁의 비밀' 세 가지를 들려줬다.
신희권 교수가 창덕궁 후원에서 부용정을 가리키며
"지붕 꼭대기에 있는 절병통(흰 원 부분)을 복원해 정조 임금 당시의 옛 모습을 되찾았다"고 했다. /이진한 기자
①금천교는 일제가 의도적으로 방향을 틀었다
창덕궁 정문인 돈화문을 지나 궐 안으로 들어서면 가운데가 불룩한 돌다리가 나온다.
보물 제1762호인 금천교(錦川橋). '비단처럼 아름다운 개울을 건너는 다리'라는 뜻이다.
그런데 이 금천교 방향이 삐딱하게 틀려 있다는 걸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신 교수는 "현재 금천교는 진선문에서
약간 서북쪽으로 비스듬히 자리해 있는데 일제가 의도적으로 방향을 틀어놓은 것"이라고 했다.
'조선고적도보'에 실린 사진 두 장을 보면 알 수 있다. 한 장엔 금천교가 진선문과 일직선으로 놓인 반면,
다른 사진에는 진선문이 철거된 후 구황실재산관리총국이 들어서 있는 상태로 다리가 틀려 있다.
신 교수는 "진선문을 허물고 구황실재산관리총국을 세운 시점 사이에 지금 같은 모습으로 변형돼 옮겨졌음을 알 수 있다.
2001년 발굴 조사에서도 북쪽으로 옮겨졌다는 사실이 확인됐다"면서
"일제가 왜곡한 금천교를 지금이라도 복원해야 한다"고 했다.
②사라져버린 부용정의 절병통
후원에 있는 아름다운 정자 부용정(芙蓉亭)에 대한 일화도 있다.
부용정 지붕 꼭대기엔 대나무 마디처럼 보이는 호리병 같은 게 있는데 절병통(節甁桶)이라 부른다.
신 교수는 "2012년 창덕궁관리소장으로 와서 보니 절병통이 없었다.
200년 전 창덕궁과 창경궁을 그린 '동궐도'에는 부용정 꼭대기에 절병통이 선명하게 그려져 있는데,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없어진 것"이라고 했다.
"다행히 부용정과 같은 시기에 만든 쌍둥이 정자 '방화수류정'이 수원 화성에 있다.
화성성역의궤에 상세히 제시된 방화수류정의 절병통 제작 도면을 근거로 부용정의 절병통을 복원할 수 있었다."
③와룡매가 고향에 돌아온 사연
선정전 앞마당엔 '와룡매(臥龍梅)'라 불렸던 매화나무가 있었다.
홍매화·백매화 두 그루가 길게 누워 자라는 모습이 엎드려 있는 용과 같다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지금은 볼 수 없다.
와룡매가 사라진 건 임진왜란 때인 1593년. 센다이번의 영주 다테 마사무네가 이 와룡매를 뽑아 일본으로 가져가 버렸다.
신 교수는 "일본 무사들은 매화를 신의의 상징으로 여겼으니 고귀한 자태의 와룡매가 탐났을 것"이라고 했다.
다테 마사무네는 1604년 와룡매를 가문의 절인 즈이간지(瑞巖寺)에 옮겨 심었다.
400여년 후, 와룡매 후손이 고향에 돌아왔다.
1999년 즈이간지의 129대 주지 스님이 와룡매의 가지를 접목해 얻은 후계목을 서울 남산의 안중근의사기념관에 기증한 것.
스님은 "일본이 조선을 침략해 저지른 만행에 대한 참회의 뜻"이라고 밝혔다.
돌아온 와룡매 두 그루는 지금도 안중근의사기념관 앞 중앙분수대 양옆에서 나란히 자라고 있다.
출처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20/03/16/2020031600020.html
신희권 교수, '창덕궁, 왕의 마음을 훔치다' 펴내 |
"'비원'이라 이름한 주체는 일제 아닌 대한제국" (서울=연합뉴스) 임형두 기자 = 창덕궁 후원은 백악의 줄기인 응봉 자락을 그대로 이용한 자연 정원이다. 아시아 3대 정원으로 꼽히는 이곳의 면적은 무려 30만 제곱미터. 창덕궁 전체 면적의 3분의 2가 넘는다. 이곳에는 160여 종 수목이 자라며, 그 가운데 70수 이상은 수령 300년이 넘은 고목들이다. 세계 어느 나라 궁궐에서도 보기 힘든 경관의 명품 정원이라 하겠다. 항간에는 창덕궁 후원을 비원(秘苑)이라 이름한 주체가 일제강점기의 일본 사람인 것으로 생각하는 이들이 있다. 이는 분명한 오해로, 비원이라 이름 붙인 주체는 일제강점기 이전 대한제국이었다. 비원의 주합루와 부용지 일원 관람정 주변의 울창한 숲 문화재청 재직 시절 창덕궁관리소장을 역임한 신희권 서울시립대 국사학과 교수는 신간 '창덕궁, 왕의 마음을 훔치다'에서 이 같은 연원을 다시 한번 환기한다. '비밀스러운 정원'이라는 의미의 비원(秘苑)으로 바꿨다는 것이다. 다만 비원이라는 이름이 창덕궁보다 더 유명해지게 된 데는 일제강점기 이래 일본인들의 영향을 무시할 수 없다고 신 교수는 덧붙인다. 원래 왕을 위한 전용 공간이던 후원은 신하들조차 왕의 초대 없이는 드나들 수 없는 신비롭고 비밀스러운 공간이었다. 그랬던 창덕궁과 창경궁의 후원이 일제에 의해 일인 관료들의 연회 장소에 바뀐 데 이어 일반인들의 놀이 공간으로 전락하면서 서울 시민뿐 아니라 전국에서 몰려온 상춘객들의 관광지로 더 유명해졌다. 이 후원이 조성되기 시작한 때는 창덕궁이 창건된 이듬해인 1406년이었다. 태종은 후원 조성과 함께 이곳에 뽕나무를 심어 비빈과 후궁들에게 양잠의 중요성을 일깨워줬고, 1410년에는 소나무도 심어 풍광을 아름답게 가꾸었다. 이후 세조와 연산군 시기를 거치면서 경역이 더욱 확장됐다. 그리고 인조 때에 이르러 지금과 같은 모습으로 틀을 잡았다. 본래 고고학 전공인 저자는 1995년 국립문화재연구소 학예연구사로 공직에 발을 들인 뒤 창덕궁관리소장, 국립고궁박물관 유물과학과장 등을 역임했다. 이 같은 경험을 바탕으로 이번 책을 출간해 창덕궁의 고고학·역사학을 넘나들며 고증한 창덕궁의 내밀한 멋과 매력을 사진과 더불어 다채롭게 보여준다. 창덕궁의 어제와 오늘을 새롭고 깊이 있게 알게 하는 안내서라고 하겠다. 역대 조선의 왕들이 가장 오랫동안 머무른 창덕궁은 임진왜란 이후부터 대한제국의 마지막 순간까지 사실상 정궁 역할을 했다. 신 교수는 "창덕궁 후원은 자연 구릉지 곳곳에서 휴식을 취하고 유락을 즐길 수 있도록 조성한 원림이다"면서 "이곳의 나무들은 오랫동안 어울려 지내며 숲이라는 하나의 생태계를 이루어 왔다"고 그 소중한 가치를 환기한다. 정재숙 문화재청장은 추천의 글에서 "창덕궁 구석구석을 발로 뛰던 저자는 일제강점기에 훼손되고 일그러진 조선 궁궐의 아픔을 통감했다. 궁궐을 위시한 문화유산 활용의 범위와 방법 등에 대한 논의가 활발한 지금, 이 책은 창덕궁을 예로 든 좋은 보고서이자 사례집이라 할 만하다"고 평가한다. 창덕궁, 왕의 마음을 훔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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