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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슴으로 읽는 한시] 다른 기사보기 즉사(卽事)

바람아님 2014. 9. 15. 09:04

(출처-조선일보 2014.09.15 안대회 성균관대 교수·한문학)



[가슴으로 읽는 한시] 즉사

/이철원

즉사


병에 젖어서 병든 줄을 까맣게 잊고
늘 한가해서 한가함이 되레 싫구나.
계단을 고쳐 맑고 푸른 물을 내려다보고
나뭇가지 잘라내어 산봉우리 드러낸다.
대나무에 물을 주며 아침저녁 다 보내고
구름을 뒤쫓아서 갔다가는 돌아온다.
밤이 되면 할 일이 더는 없기에
달을 마중하러 사립문에 기대선다.


卽事

慣病渾忘病(관병혼망병)
長閑却厭閑(장한각염한)
補階臨淨綠(보계임정록)
刊樹露孱顔(간수노잔안)
灌竹晨仍夕(관죽신잉석)
尋雲往復還(심운왕부환)
淸宵更無事(청소갱무사)
邀月倚松關(요월의송관)


조선 중기의 저명한 문신이자 학자인 우복(愚伏) 정경세(鄭經世·1563 ~1633)가 오랫동안 병석에 누워 있었다. 
긴 병을 앓다보니 무료하고 심심하여 못 견디겠다. 그래서 병자라는 것도 잊고 소일거리를 찾아본다. 
계단을 고쳐 맑은 못도 내려다 보고, 무성한 가지를 쳐서 푸른 산도 후련하게 보이게 한다. 
대나무에 물을 준다고 괜히 아침저녁 오락가락하고, 흰 구름을 찾아 산 아래까지 갔다가 돌아온다. 
낮에는 그럭저럭 시간을 보낼 수 있어 좋다. 문제는 밤이다. 
더는 일할 거리가 없어 달을 구경한다는 핑계로 문밖을 나서 하늘을 올려다본다. 
병과 더불어 살아가는 법을 알 것만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