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득신의 작품 ‘여름날의 짚신 삼기’(그림1)다.
사내가 웃통을 벗고 앉아 발가락에 신날 둘을 걸고 짚신을 삼고 있다. 왼쪽 발 앞에는 벌써 삼은 한 짝이 놓여 있다.
짚신은 신틀(그림3 ‘신틀’)에 걸어서 삼지만, 신틀이 없으면 그냥 발가락을 이용해도 된다.
윤두서가 그린 ‘짚신 삼기’(그림2)라는 그림도 있다. 김득신의 그림과 다를 것이 없다.
짚신은 조선시대에 가장 보편적인 신발이었다. 그런데 하필이면 짚신인가.
신발이 닳아 없어지는 물건이라는 것을 상기한다면, 그 재료는 정반대의 성질을 가진 것 둘뿐이다.
먼저 잘 닳지 않는 것이 재료가 될 가능성이 있다. 가죽 같은 것이다. 하지만 가죽은 구하기 어렵고 가공하기도 어렵다.
또 하나는 가장 구하기 쉬운 재료일 수도 있다는 것이다.
풀이나 짚 같은 것이다. 벼농사를 짓고 사는 사회에서 짚신은 두 번째의 이유로 해서 선택된다.
●신을 수 있는 신발 계급별로 정해져
짚신의 역사는 오래다.
중국 송나라 마단림은 ‘문헌통고’에서 마한(馬韓)의 풍속을 소개하면서,‘신발은 초리(草履)를 신는다.’고 했는데,
이 초리가 곧 짚신이다.
서긍은 ‘고려도경’에도 초구(草)란 항목에서 “초구(짚신)의 형태는 앞쪽이 낮고 뒤쪽이 높아 모양이 이상하지만,
온 나라의 남자 여자 어른 아이가 다 신는다.”고 하고 있으니, 짚신은 역시 고려 시대의 남녀노소가 신는 보편적인
신발이었던 것이다. 조선시대 사람들이 짚신을 신는 전통 역시 저 삼국시대 이전 시대로부터 물려받은 것이다.
흔히 옷은 그 사람이라 한다. 무슨 옷을 어떻게 입고 있는가에 따라 그 사람됨을 파악하고 평가하게 된다.
신발도 마찬가지다. 미국 드라마 ‘섹스앤드더시티’의 사라 제시카 파커가 좋아하는 마놀로 블라닉 구두란 것은 단순한 구두가
아니다. 어떤 브랜드를 소비하는가에 따라 그 사람의 취향만이 아니라, 그 사람의 사회적 지위가 드러난다.
현대는 그 취향 뒤에 있는 사회적 지위를 돈이 구체화하지만,
조선시대는 신분, 곧 양반인가 아닌가, 관료인가 아닌가 하는 구분이 사회적 지위를 구체화한다.
곧 조선시대 신발은 계급별로 정해져 있었던 것이다.
‘경국대전’ 예전의 ‘화혜(靴鞋)’를 보면,
정1품부터 정9품까지 품계가 있는 벼슬아치는 조복(朝服)과 제복(祭服)에는 흑피혜(黑皮鞋), 공복(公服)에는 흑피화(黑皮靴)를
신게 되어 있었다. 다만 1품에서 3품까지는 평상복에 협금화(挾金靴)를 신는다고 규정되어 있다.
4품에서 9품까지는 평상복에 어떤 신발을 신으라는 규정이 없다.
‘화(靴)’와 ‘혜’는 같은 신발이지만, 서로 다르다.
‘화(靴)’는 목이 긴 신발이고,‘혜(鞋)’는 목이 없는 신발이다.
여성들이 신는 가죽신인 운혜나 당혜가 모두 목이 없다는
것을 생각하면 된다.
흑피(黑皮)란 검은 가죽이니, 이런 신발들은 검은 가죽으로
만든 신발이다.
협금화(挾金靴)는 금속, 즉 징을 박은 신발이다.
앞의 흑피화 바닥에 징을 박은 것이 아닌가 한다.
특별히 정1품에서 3품까지는 평상시에도 징을 박은
가죽신을 신도록 허락했던 것이다.
가죽신을 신는 사람이 이렇게 정해져 있다 보니,
짚신은 자연스레 돈이 없고 신분 처지가 낮은 사람들의 차지다.
그림(1)과 (2)에서 보듯 조선시대 백성들은 대부분 짚신을 삼을
줄 알았다. 다만 솜씨가 있느냐 없느냐의 차이가 있었을 뿐이다.
그러나 조선시대라 해도 도시 사람, 곧 서울 사람들은 신발을
사서 신었다. 당연히 서울 시내에 신발을 파는 가게가 있다.
유본예의 ‘한경지략’에 의하면, 미투리전에서 생삼, 숙마의
미투리와 짚신을 판다고 하였고, 미투리전은 여러 곳에 있다고
하였다.
여기서 파는 짚신 중에 가장 인기가 있는 짚신은,
서린동 전옥서 감옥에서 죄수들이 삼은 것이라 하였다.
왜냐고? 죄수들은 할 일이 없어 시간을 죽이는 사람들이다.
신을 삼아 팔면 먹을 것이 나온다.
한데 그것이 직업은 아니니까 정성을 들인다. 신발이 꼼꼼하고 질길 수밖에 없다.
●재주 없는 사람들이 살아가는 방편 되기도
죄수에게 짚신 삼기가 돈이 되듯, 보통 사람에게도 짚신 삼기는 돈이 되었다.
이유원의 ‘임하필기’를 보면 이지함이 굶주린 백성을 살린 일이 실려 있는데, 여기에 흥미롭게도 짚신 이야기가 나온다.
요지는 이렇다. 선조 3년(1570)에 영남 지방에 기근이 들었다. 이지함이 떠돌아다니며 밥을 빌어먹는 백성들을 보니 몰골이
말이 아니다. 그는 큰 집을 지어 유민들을 수용하고 사람의 소질을 보아가며 이런 저런 수공업을 가르치고 그것으로 먹고 살
방도를 마련해 준다. 그런데 언제나 아무 재주도 없는 사람이 있는 법이다. 그런 사람에게는 볏짚을 가져다주고 짚신을
삼으라 한다. 곁에서 챙겨보니, 하루에 열 켤레는 삼는다. 이렇게 해서 만든 물건을 내다 파니, 먹을 것이 생긴다. 돈을 모아
옷도 다시 지어 입도록 한다. 이처럼 짚신 삼기는 아무 것도 없는 사람이 살아가는 방편이 되기도 했던 것이다.
가죽신은 원래 벼슬을 하거나 돈 많은 양반의 것이었다. 하지만 이 관습도 조선후기가 되면 바뀐다.
이수광은 ‘지봉유설’에서 “예전에는 선비들이 말을 타고 다니는 것을 금했기 때문에 짚신을 신고 걸어 다녔고,
말을 타는 일은 드물었다. 지금은 조관(朝官)처럼 가죽신을 신고 말을 타고 다닌다. 걸어 다니는 사람은 없다.”고 하고 있다.
즉 임진왜란 이전에는 벼슬아치들만이 가죽신을 신고 말을 타고 다니고 선비들은 짚신을 신고 걸어 다녔다는 것이다.
그런데 전쟁 이후 선비들도 가죽신을 신고 말을 타고 다닌다는 것이다.
이익은 이런 풍조에 대해 비판적이다. 그는 ‘성호사설’의 ‘초갹(草 )’ 이란 글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왕골신과 짚신은 가난한 사람이 늘 신는 것인데, 옛사람은 그것을 부끄럽게 생각하지 않았다.
지금 선비들은 삼으로 삼은 미투리조차 부끄럽게 여기고 있으니, 하물며 짚신이야 말해 무엇하겠는가.
영남 지방의 풍속은 보통 때는 짚신을 신고, 미투리는 외출할 때만 신는다 하니, 그 검소함을 본받을 만하다.”
영남 지방에만 검소한 풍속이 남아 있어 선비들이 집에서는 짚신을 신고 외출할 때만 미투리를 신는다는 것이다.
미투리는 볏짚이 아니라, 삼이나 노(종이를 비벼 꼰 줄)로 만든 신이다. 짚신에 비해 훨씬 정교하다.
서울 선비들은 고운 삼으로 삼은 미투리조차 신지 않으려 하는데, 영남 사람들은 그 미투리를 외출용 신발로 신는다는 것이다.
이익은 영남의 검박(儉朴)한 풍습에 감동했는지 곳곳에서 칭찬을 거듭하고 있다.
‘영남속(嶺南俗)’이란 글에서는 다시 영남 선비들이 짚신을 신고 미투리조차 잘 신지 않는 풍습을 소개한 뒤
“경기 지방 선비가 만약 영남의 검소한 풍속을 본받는다면, 사람들이 반드시 그와 혼인하는 것을 부끄러워할 것이다.”라고
말하고 있다.
●버리는 짚신은 거름으로 재활용
외출을 하려고 문간에서 신발장을 열어 보니 안 신는 신발이
가득하다. 예전에 신발 뒤축이 한쪽만 자꾸 닳아 샀던 가게에
가서 밑창을 갈아달라고 하니, 엉뚱한 것으로 갈아준다.
그 신발을 신고 다니다가 빗길에 미끄러져 무릎을 다친 뒤로는
다시는 밑창을 갈아 신지 않는다.
그러니 신발장에 위쪽은 멀쩡하건만 한 쪽 밑창이 닳은 신발이
여럿이다. 이래도 되나 하는 생각이 든다.
성현의 ‘용재총화’에는 짚신조차 아꼈던 사람의 이야기가 전한다.
고려시대 때 지씨 성의 구두쇠 재상이 있었는데,
“설과 한식이 되면 공동묘지에 사람을 보내 지전을 주워 오게 해서
도로 종이를 만들고, 남이 신다 버린 짚신을 주워 땅에 묻고 동과
씨를 심었는데, 동과가 잘 열려 많은 이문을 남겼다.”고 한다.
짚신을 거름으로 썼던 것이다.
실제 허균은 ‘한정록’에서 버리는 짚신을 외양간에 넣어
소의 똥오줌에 썩혔다가 마늘을 심는 데 거름으로 넣으면 마늘이
굵게 자란다는 농법을 소개하고 있다.
홍만선 역시 ‘산림경제’에서 버리는 짚신은 말 오줌에
담가두었다가 파초를 심을 때 거름으로 쓰면 파초가 잘 자란다고
하고 있다.
짚신도 버리지 않고 이렇게 활용하는데,
신발장 속에 쟁여 있는 멀쩡한 내 신발들은 도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아무리 풍요로운 자본주의 시대라 하지만 솔직히 말해 아까운 생각,
부끄러운 생각이 든다.
어디 이번 여름에는 나도 짚신이나 신고 다닐까 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