生活文化/세상이야기

[만물상] 도심 절밥

바람아님 2016. 6. 19. 06:31

(출처-조선일보 2016.06.18  김광일 논설위원)

보름 전 서울 성북동 가구박물관을 구경했다. 일행 다섯이 근처에서 점심을 때우기로 했다. 

누군가 길상사 점심 공양을 제안했다. 첨엔 뜨악했으나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가구박물관 모퉁이만 돌면 5분 거리였고 무엇보다 '공짜 밥' 아닌가. 일주문 지나 왼쪽으로 지장전 일층에 공양간이 있다. 

스무 명 남짓한 줄 끝에 섰다. 참기름 두른 갖은 나물 담긴 스테인리스 양푼에 밥 한 주걱 받고 고추장도 한 숟가락 얹었다.


▶다들 달게 먹었다. 평소 밥알을 깨작거리던 이도 그릇을 깨끗이 비웠다. 

원산지가 의심스러운 육고기도, 마음 흩어놓는 향신료도 없어서일까. 먹자 골목 8000원짜리 음식과는 차원이 달랐다. 

벽에 '묵언(默言)'이라 적혀 있었지만 가망가망 수다 꽃을 피웠다. 

어릴 적 온 식구가 바투 앉던 둥근 밥상도 떠올랐다. 어머니가 차려주던 집밥이 이러했던가. 

그날 알싸했던 절밥 향내가 아직 혀끝에 맴도는데 어제 조선일보에 '절밥 먹는 강남 직장인' 기사가 실렸다.

칼럼 관련 일러스트

▶마천루 숲으로 둘러싸인 서울 삼성동 봉은사에 점심때면 직장인이 몰린다고 했다. 350석 공양간이 꽉 들어찬단다. 

부근 사무실에서 온 사람도 하루 50~70명쯤이고 택배기사나 야쿠르트 아줌마, 환경미화원도 단골이라 했다. 

보시함에 1000원을 넣기도 하지만 그냥 먹어도 된다. 

도심 절밥을 찾는 이에겐 빠듯한 주머니 사정도 있겠으나 건강한 채식에 이끌렸을 법도 하다. 

취나물 무침에 겉절이 김치와 김칫국을 안심하고 먹을 데가 어디 흔한가.


▶법보신문은 범어사 낙산사 봉은사 금선사 통도사 보원사 영평사 길상사공양간으로 소문난 사찰로 소개한 적이 있다. 

'열린 공양간'은 채소·나물을 뷔페처럼 차리거나 비빔밥이나 국수를 내놓는다. 

불가에서 내가 닦은 공덕을 남에게 돌리면 회향(廻向)이다. 절집으로선 대중 공양만 한 회향이 없다. 

식사를 마친 뒤 후원 솔숲을 걷는 힐링이 절집 디저트인 셈이다. 

신자라면 부처님 얼굴을 뵙는 정화(精華)로 마음까지 씻고 나온다.


▶절밥은 전체식(全體食)이다. 밥알 하나 콩나물 꽁지 하나 안 버린다. 

나물 데친 물로 국 끓이고 표고 불린 물로 찌갯거리  삶는다. 

양평 묘적사에 템플 스테이 갔을 때 막내가 설거지까지 곧잘 해서 놀랐다. 

책 '2016 대한민국 트렌드'는 '정서적 허기 때문에 집밖에서 집밥을 찾는다'고 했다. 

절밥에서는 '건강' '탈속' '자비'를 떠올릴지 모르겠다. 

길상사 회주 법정은 세상 뜨셨지만 공양간 양푼에 그분 미소가 담긴 듯했으니, 

"여보시게 시주는 안 하고 공양만 하고 가나…."



[NOW] 절밥 먹는 강남 직장인 '천원의 행복'

(조선일보 2016.06.17 이민석 기자/ 최주용 기자)

강남 봉은寺, 점심때 식당 개방… 지갑 얇은 회사원 행렬 줄이어
"국밥 한 그릇도 8000원 넘는데… 식비도 아끼고 채소 위주라 좋아"

봉은사 향적원 점심지난 9일 오전 11시 40분 서울 강남구 삼성동 봉은사. 코엑스 등 
고층 건물이 숲을 이룬 도심 한복판에 자리 잡은 이곳에 단정한 옷차림의 
남녀 직장인들이 속속 입장했다. 이들이 발걸음을 멈춘 곳은 대웅전 옆 
향적원(香積院)이란 건물이었다. 건물 앞엔 이미 20대부터 50~60대까지 
연령대가 다양한 50여명이 줄을 서고 있었다. 이들의 손엔 1000원짜리 
지폐가 한 장씩 쥐어져 있었다. 봉은사의 공양간(식당)인 향적원에서 
점심을 먹으려는 사람들이다.

봉은사는 평일과 주말을 가리지 않고 매일 오전 11시 30분부터 
한 시간 동안 향적원에서 점심〈사진〉을 제공한다. 
식당 입구에 설치된 '보시(布施·널리 베풂)함'에 1000원씩 내면 누구나 
점심을 먹을 수 있다. 돈을 벌기 위한 목적으로 운영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꼭 돈을 내지 않아도 식사를 할 수 있다.

10여분쯤 줄을 섰다가 들어간 향적원 내부 식당은 좌석 350개가 
꽉 차 있었다. 메뉴는 취나물 무침, 겉절이 김치, 무짠지와 김칫국. 사찰 음식답게 고기는 없었다. 
배식을 담당하는 봉은사 봉사단원들이 "식사 다 하신 분들은 여기 와서 백설기도 가져가시라"고 외쳤다. 
인근 IT 회사에서 일하는 김성은(42)씨는 "강남에서는 국밥 한 그릇도 8000원이 넘는데 매일 나가서 
먹는 게 부담된다"며 "점심값을 아끼면서 채소 위주의 건강식을 먹으려고 이곳을 자주 찾는다"고 했다.

봉은사는 신도들에게만 식사를 대접했던 향적원을 지난 2006년 일반인에게 개방했다. 
처음엔 불교 신도들과 인근 주민들이 자주 찾다가 차츰 소문이 나면서 주변 직장인들에게 명소가 됐다. 
생업에 바쁜 택배 기사나 야쿠르트 아줌마, 환경미화원들도 봉은사 1000원 식당의 단골이 됐다. 
이 절의 상인 스님은 "지난해까지 이곳을 찾는 직장인 수는 20~30명 남짓이었는데 올해는 50~70명으로 
배 이상으로 늘었다"고 했다. 경기 불황으로 직장인들의 지갑이 얇아지면서 생긴 새로운 풍경이다.

평일에는 평균 700명, 주말에는 관광객들까지 몰려 1500여명이 이곳에서 점심을 먹는다. 
점심값 1000원으로 받은 수익금 전액  은 저소득층 청소년에게 장학금을 지급하거나 독거 노인들의 
식사를 지원하는 데 쓰인다.

복잡한 도심에서 벗어나 식사 후 경건한 사찰 내부를 산책하면서 '힐링(치유)'을 할 수 있다는 점도 봉은사 
점심의 매력이라고 직장인들은 말한다. 
직장인 박상영(59)씨는 "정신없는 업무를 잠시 잊고 천천히 밥을 먹은 뒤 시원한 숲을 걷다 보면 
스트레스가 확 풀린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