文學,藝術/전시·공연

옛 서울역사가 숨쉰다, 生命의 빛으로

바람아님 2015. 6. 16. 14:25

(출처-조선일보 2015.06.16 김미리 기자)

[문화역서울 284의 변신, '은밀하게 황홀하게'展]

빛 활용한 미디어 아트 등 140점, 전시용 벽 없어 옛 공간 드러나
역장실, 벽·천장 오가는 영상作… 2층 양식당엔 파리 풍경 펼쳐져
신수진 예술감독 부임 첫 전시 "驛舍 완공시 발달한 예술서 착안"

KTX를 위한 신(新)역사가 생기고 옛 서울역사가 '문화역서울 284'란 이름을 달고 문화 공간으로 바뀐 지 올해로 5년째다. 
그러나 왜 이름에 284란 꼬리표가 달렸는지(사적 제284호라 붙은 숫자다), 
여기서 전시가 열린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게다가 광장의 노숙자, 잦은 시위가 관람객의 발길을 돌리게 한다. 문화 공간이라 말하기엔 아직 한계가 많다.

지난 3월 문화역서울 284 예술감독에 임명된 사진심리학자 신수진(47)씨는 공간을 맡자마자 홈페이지에 있는 소개글부터 
읽었다. '누구에게나 열려 있는 역동적이고 개방된 복합문화공간입니다.' 첫 줄을 읽는 순간 헛웃음이 났다. 
지금의 문화역서울 284는 누구에게나 열려 있지도 않고 폐쇄적이며 복합문화공간으로 사용되지 않고 있는 공간 아닌가. 
신 감독은 정체된 공간의 변신을 위해 선언했다. 
"문화재를 하드웨어로만 생각하면 보존에 초점이 맞춰질 수밖에 없다. 소프트웨어로 접근해서 생명력을 지니고 
진화하는 공간으로 만들겠다."


	(사진 위)옛 서울역의 귀빈실이었던 공간에 작가 이상진의 작품 ‘라이팅 토크’가 설치된 모습. 가벽이 전혀 없어 원래 건물의 벽면과 장식이 그대로 보인다. 자연스레 공간 자체가 새로운 작품이 됐다. (사진 아래)옛 서울역사를 개조해 만든 문화역서울 284 외관.
(사진 위)옛 서울역의 귀빈실이었던 공간에 작가 이상진의 작품 ‘라이팅 토크’가 설치된 모습. 가벽이 전혀 없어 원래 건물의 벽면과 장식이 그대로 보인다. 
자연스레 공간 자체가 새로운 작품이 됐다. (사진 아래)옛 서울역사를 개조해 
만든 문화역서울 284 외관. /문화역서울 284 제공
11일 문화역서울 284에서 개막한 
'은밀하게 황홀하게: 빛에 대한 31가지 체험'은 신 감독이 세 달간 고심해 내 놓은 첫 결실이다. 
변화를 꾀할 카드로 내민 주제는 '빛'이다. 
1925년 완공된 옛 서울역사가 근대 건축물로서 지닌 역사성과 그 시기 발달한 예술 장르의 교집합을 찾은 결과다. 
신 감독은 "건물이 만들어질 무렵인 1910~20년대 유럽에선 아방가르드 예술가들이 빛의 효과를 적극적으로 쓰기 
시작했다는 사실에 착안했다"고 설명했다. 
못 하나 맘대로 박을 수 없는 문화재라는 공간적 한계를 극복하기 위한 묘안이기도 했다.

빛을 활용하는 사진, 회화, 미디어 아트 140여 점(8개국 31팀)이 전시됐다. 
벽에 거는 회화 작품이 적으니 건물을 가리는 가벽을 설치할 필요가 없었다. 
그 덕에 옛 공간의 정취가 그대로 전해진다.

1층 귀빈예비실이었던 공간엔 사진가 민병헌의 작품 '스카이' 시리즈가 있는 듯 없는 듯 벽면에 붙어 있다. 
역장실엔 독일 영상 작가 올리버 그림의 미디어 작품 '도시 챕터'가 무빙라이트(움직이는 특수 영상 장치)를 통해 벽면과 
천장을 오가며 흘러나온다. 근래에 이렇게 현란하면서도 몰입도 높은 영상작을 본 적이 없다.


	조덕현의 설치 작품 ‘모성’ 사진
조덕현의 설치 작품 ‘모성’. 옛 서울역이 성당같이 연출됐다. 
/문화역서울 284 제공

압권은 국내 최초의 양식당 '서울역 그릴'이 있던 2층. 

낡은 벽난로 위로 벽면과 천장을 타고 프랑스 영상 작가 스테노프에스가 찍은 파리 풍경이 펼쳐진다. 

바닥에 앉은 채 벽면으로 흐르는 파리의 고풍스러운 건축물을 한참이나 넋 놓고 봤다. 

앙드레 케르테츠, 만 레이 같은 거장의 사진이 소박해 보일 만큼 강력한 작품이다. 

독일 사진가 베른트 할프헤르의 작품이 걸린 조리실 벽엔 음식 운반용 엘리베이터가 보인다. 

가벽을 걷자 이전 전시들에선 드러나지 않았던 보석 같은 디테일이 하나씩 살아났다.

사각지대였던 계단도 전시 공간이 됐다. 

어두컴컴한 지하 계단엔 말라비틀어진 낙엽 같은 작가 함진의 설치물 '도시 이야기'가, 

2층 계단엔 작가 그룹 '뮌'(최문선, 김민선)이 작은 사람 모형을 붙여 만든 조명 '그린 룸'이 걸려 있다. 각 공간을 최적화된 

맞춤형 작품으로 채운 솜씨가 감탄을 자아낸다. 다만 원래 공간의 용도를 알려주는 설명이 없는 건 아쉽다.

내부의 빛을 잘 보려면 외부에서 들어오는 빛은 차단해야 한다. 

햇빛을 차단하는 특수 필름지를 창에 붙여 내부를 어둡게 했다. 

작은 차이지만 집중도는 한층 더 높아졌고, 이 여름 예술과 함께하는 의외의 피서지가 됐다. 

더운 날 서울역에서 여행 떠나기 전 시원한 공간에서 예술과 함께 워밍업하는 것도 괜찮을 것 같다. 

여행과 함께하는 예술. 이것이야말로 문화역서울 284만이 누릴 수 있는 장점 아닌가. 7월 4일까지. (02)3407-3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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