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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양순성기] ②공구리를 쳐도 한양도성

바람아님 2015. 7. 14. 09:20

조선비즈 : 2015.07.11

 

 

숭례문에서 SK남산빌딩을 지나 서울힐튼호텔 앞 남산공원 입구에 이르면 2011년에 복원이 끝난 한양도성 회현자락의 유려한 곡선이 눈에 들어온다. 성곽과 함께 잘 다듬어 놓은 산책로를 잠깐만 걸어도 서울은 오랜 역사를 가진 아름다운 도시라는 감동이 차오른다. 곧 나타나는 김구 선생과 안중근 의사의 동상 옆을 지날 때면 일제의 식민지 지배도 이겨낸 이 도시와 그 시민들이 참 대단하다 싶다.

만만치 않은 남산의 경사에 숨이 가빠질 즈음이면 지금까지 보던 성곽과 다른 재질, 다른 공법으로 만들어진 조악한 성벽이 눈에 들어온다. 이 성벽은 남산타워, 남산 미군부대 앞까지 이어진다. 일제가 1925년 조선신궁을 만들면서 남산 서북쪽 자락 성벽을 헐어버렸기에 조선시대 만들어진 성곽일 리는 없다. 자세히 들여다 보면 여장(성벽 윗부분의 담장) 소재로 쓰인 돌들이 공원 입구 성벽의 돌보다 작고 검은 편마암이다. 남산 3호터널 공사장에서 나온 것들이다.


한양도성 성곽의 구조 / 자료 = 한양도성박물관
한양도성 성곽의 구조 / 자료 = 한양도성박물관

허연 시멘트가 여장을 쌓아올린 돌과 돌 사이를 채웠다. 여장 맨 위도 시멘트 마감이다. 여장 위에 발라놓은 시멘트들은 40년의 세월을 못 이기고 금이 갔다. 일부는 떨어져 나갔고 남은 것들도 부스러져 흘러내린다. 성벽 뒤채움에는 콘크리트가 쓰였고 배수를 위해 PVC 파이프가 곳곳에 설치됐다. 전통적 뒤채움 방식은 잡석과 진흙을 섞어 써서 자연배수가 가능했다. 서울시 한양도성도감은 공식 홈페이지에서 "과거에는 단절된 구간을 연결하는 데에만 치중하여 오히려 주변 지형과 원 석재를 훼손하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고 평가하고 있다.


 
 
1970년대 복원한 한양도성 남산지구 성곽 여장 위에 발라놓은 시멘트들은 40년의 세월을 못 이기고 금이 갔다. 일부는 떨어져 나갔고 남은 것들도 부스러져 흘러내린다./ 사진=박정엽

이 시멘트 성벽은 1974년 박정희 대통령의 지시로 시작된 '서울성곽 정화사업'의 남산지구와 장충지구 공사의 결과다. 대한종합건설(주)이 당시 돈 4억5천만원을 들여 1977년 10월초부터 1978년 12월말까지 15개월만에 끝냈다. 1977년 8월 22일자 <동아일보>에서 이태기 서울대 교수는 "문화재의 비중은 그 역사성에 있으므로 새로운 조형은 문화재가 아니라고 전제하고 보수를 하기 전 상태를 상세히 기록, 원형 유지에 힘써야 하고 콘크리트는 전도체이므로 문화재에 해를 끼칠 우려가 많은 만큼 신중을 기해야 한다"고 문제를 제기했지만 묵살됐다.

1970년대는 콘크리트와 시멘트에 대한 애정이 하늘을 찌르던 시대였다. 1970년 7월 경부고속도로가 준공되고 1973년 삼환기업의 사우디아라비아 고속도로 공사 수주를 시작으로 중동건설 붐이 일었다. 1970년대 후반 외화수입액의 80% 이상이 중동건설 현장의 오일달러였다. 콘크리트와 시멘트가 곧 밥이었다. 토목건설사업에 대한 신뢰는 그후 수십년간 이어지고 있다. 2007년에는 현대건설 경영자 출신의 이명박 대통령이 4대강 사업을 핵심공약으로 내걸고 당선되기도 했다.

의도하지 않았지만 남산지구 성벽에 이같은 시대상이 반영된 셈이다. 이 성벽이 다른 성벽과 다른 이유를 아는 사람은 이 땅의 근현대사를 좀 더 깊이 이해할 수 있으리라. 박정희 대통령의 1974년 지시를 기준으로 하면 '서울성곽 정화사업'이 시작된지 40년을 넘겼으니 웬만한 근대문화유산 만큼 오래되기도 했다. 자세히 보면 짙푸른 이끼가 내려앉은 시멘트 성벽이 정겹기도 하다. 시멘트 성벽은 18.6km에 이르는 한양도성에서 2.7km에 불과하다. 나머지 구간에는 또 어떤 역사가 숨어있을까. 새삼 한양도성의 600년 역사가 묵직하게 다가온다.


한양도성 남산지구. 자세히 보면 짙푸른 이끼가 내려앉은 시멘트 성벽이 정겹기도 하다. / 사진=박정엽
한양도성 남산지구. 자세히 보면 짙푸른 이끼가 내려앉은 시멘트 성벽이 정겹기도 하다. / 사진=박정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