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일보] 입력 2015.12.28
크리스마스인 25일 오후 4시 외교부가 홈페이지에 “위안부 피해 문제 논의 등을 위해 28일 서울에서 한·일 외교장관 회담이 열린다”고 공지했다. 지난달 초 한·일 정상회담에서 ‘위안부 문제 조기 타결 협의 가속화’를 발표했던 만큼 한·일 외교장관의 전격 만남은 큰 뉴스다. 그러나 이날은 김 빠진 맥주였다.
하루 전인 24일 오후 5시51분 일본 NHK방송이 기시다 후미오(岸田文雄) 일본 외상의 방한 소식을 이미 전했기 때문이다. 당시 외교부는 NHK 보도 3시간 뒤인 오후 8시33분에야 첫 입장을 내면서 “ 구체 사항이 결정되는 대로 밝힐 것”이라고 했다.
한국 정부가 대응을 미루는 사이 일본 언론들은 온갖 보도들을 쏟아냈다. ‘한·일이 합의하면 미국이 환영 성명을 내 최종 해결을 보장할 것’(요미우리)이라든지, ‘박근혜 대통령이 내년 초 방일할 것’(교도통신)이란 내용 등이었다.
한·일 외교장관 회담을 상대국과 공식 협의도 없는 상황에서 미리 보도하는 게 정상적인 행태는 아니다. 하지만 다 알려진 사실을 확인해주는 데만도 하루 가까이 걸린 건 한국 정부가 일본이 주도하는 분위기에 끌려가고 있다는 인상을 주기에 충분했다.
특히 한·일 사이엔 중요한 이슈가 있을 때마다 이런 ‘패턴’이 반복되고 있다. 일본 당국자들이 정보를 흘리면→일본 언론들이 앞다퉈 보도하고→일본 정부가 이를 확인하면→한국 정부는 여론이 들끓은 뒤에야 맞다 혹은 아니다라는 뒷북 대응을 하는 식이다.
유일한 예외라면 26일 요미우리(讀賣)신문의 보도에 대한 대응 정도다. 요미우리가 1면에 주한 일본대사관 앞 평화의 소녀상을 남산으로 이전하는 방안을 한국 정부가 검토 중이라고 보도하자 외교부는 이례적으로 신속 대응했다. 조준혁 대변인은 “터무니없다” “일본의 저의가 무엇이냐”는 표현을 동원해 비판했다. 이상덕 동북아국장은 주한 일본대사관 관계자까지 불러 항의했다. “일본의 저열한 언론플레이가 도를 넘었다”는 윤병세 외교부 장관의 지시 때문이었다고 한다. 하지만 이처럼 책임 있는 당국자가 즉각 나서 일본 언론 플레이의 맥을 끊는 일은 드물다. 일본에서 온갖 억측이 다 나온 뒤, 도가 넘은 뒤에야 나선다. 당연한 정부의 이번 대응을 대부분 언론이 ‘이례적’이라고 보도한 이유다.
일제 강제징용시설의 세계문화유산 등재 때도 그랬다. 일본은 6월 한·일 외교장관회담에서 ‘forced to work(강제로 노역했다)’라는 표현을 넣기로 합의했으면서 세계문화유산위원회에서 한국 몰래 이 표현이 빠진 수정안을 회람시키다 들켰다. 그런데도 일본 언론은 “한국이 뒤통수를 쳤다”는 식의 보도를 이어갔고, 정부는 적극 대응을 하지 않았다.
11월 한·일 정상회담 이후에도 일본 언론의 ‘오보’가 쏟아졌지만, 정부는 “정상회담의 동력을 이어가야 한다”며 공식 대응을 자제했다. 그러다 정상회담의 세세한 내용까지 왜곡 보도하는 외교적 결례 상황이 된 뒤에야 대응에 나섰다.
“일본의 꼼수에 우리가 일일이 대응하면 그 덫에 말려드는 것”이라는 외교부의 설명도 일리는 있다. 하지만 이런 상황이 반복되는 걸 지켜보는 국민은 불안하다. 소녀상 문제만 해도 그렇다. 위안부 협상의 본질과 무관하고, 정부가 아닌 민간에서 알아서 할 문제인데도 일본 언론들은 이번 외교장관회담에서 이 문제가 비중 있게 논의될 것처럼 분위기를 띄우고 있다.
이런 식의 일본 외교가 정도(正道)는 아니다. 하지만 ‘아베의 좌충우돌 외교’에 매번 당하면서도 우리만 정공법으로 대응하는 건 능사가 아니다. 야구에서 삼구삼진이 속 시원하지만 아웃을 잡으려면 내야 땅볼도, 외야 플라이도 유도할 줄 알아야 한다. 상대 타자들이 보고도 못 치는 강속구만 던질 자신이 없는 이상 ‘맞춰 잡는 플레이’도 할 수 있다는 걸 보여줘야 한다.
유지혜 정치부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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