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조선일보 2015.12.29 강경희 경제부장)
바야흐로 선거철… 각 분야 국회의원 지망생들 너도나도 자리 박차고 일어나
책임감 있는 사람에게 맡겨 꾸준히 경영 성과 내야 공공개혁도 절로 이뤄질 것
얼마 전 편지를 한 통 받았다. 겉봉에 금박 은행나무 잎이 찍힌 고급스러운 봉투였다.
번듯한 기관장 직책을 갖고 있던 사람이었는데, 보낸 곳 주소지가 집인 걸로 봐서 봉투 뜯어보기도
전에 내용은 능히 짐작되는 터였다.
'안녕하십니까? 그간 보내주신 사랑, 잊지 못합니다'라고 시작된 서신은 '가족과 더 많은 시간을 함께
보내면서 여생의 삶을 즐기겠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더니 후반부 단락은 '그런데 예기치 못했던 운명이
저를 또다시 뒤흔들어 놓았다'는 반전의 문장으로 이어졌다. 결론인즉슨 "주변 분들과 동네 분들과의
만남을 통해 새로운 도전을 결심하게 됐고, 국가와 지역사회를 위한 마지막 봉사를 하고 싶다는
강력한 소명을 갖게 됐다"는 것이다.
얼마 전 서울 중구에 예비후보 등록을 마친 김행 전 양성평등교육진흥원장의 서신이었다.
김행 전 청와대 대변인은 지난해 초 여성가족부 산하 기관인 양성평등교육진흥원에 전임 원장의 연임 임기가
다 끝나기도 전에 새 원장 자리를 꿰찼다. 누가 봐도 낙하산 인사였으나, 조직도 개편하고 의욕적으로 활동하는 걸 보면서
'낙하산 인사'에 색안경만 끼고 볼 일은 아니겠다는 생각을 잠시 했었다. 하지만 3년 임기 중 절반 좀 넘기고 '운명을 뒤흔든
강력한 소명'을 찾아 떠났으니, 나이지리아 수준에 불과하다는 한국의 심각한 양성 불평등 상황도 그에게는
서울 중구 동네 분들 복지보다도 덜 급박한 이슈인가보다.
양성평등교육진흥원이야 여성가족부 산하의 작은 공공기관이니 아는 사람들 입에 가십거리로 오르내린 정도에 불과하지만,
인천공항공사같이 규모가 크고 치열한 국제적 경쟁에 놓인 공기업 상황은 훨씬 더 황당하고 심각하다.
인천공항공사의 경우, 박근혜 정부 들어 2년 10개월 동안 사장이 두 번 바뀌고 다시 공석이다.
처음 석 달간 공석이었다가 전문성 논란에도 사장이 된 정창수 전 사장은 강원도지사 선거에 출마하겠다고 8개월 만에 나갔다.
이어 7개월간 공석 끝에 후임이 된 창원 시장 출신의 박완수 사장도 임기 절반도 안 채우고 1년 2개월 만에 그만두고
총선 채비에 나섰다.
비슷한 시기에 김석기 한국공항공사 사장도 총선 출마를 위해 임기를 10개월 남기고 사퇴했다.
바야흐로 선거가 다가오니, 각 분야에 흩어져 자리보전하던 정치인 또는 국회의원 지망생들이 '분연히(?)' 자리를 박차고
일어선다. 호시절엔 농사짓다가 전쟁 터지니 창 들고 나서는 농경시대 병졸들을 보는 것만 같다.
그래서 박 대통령 눈에는 이들이 국민을 위하는 진실된 사람으로 보이는 것일까?
박 대통령은 최근 장관직에서 물러나 총선 출마 준비에 나서는 최경환 부총리 등 장관들 이름을 거명하면서
"옛말에 들어갈 때 마음과 나올 때 마음이 한결같은 이가 진실된 사람이라는 말이 있다"고 격려했다.
지난 11월 국무회의에서는 "국민을 위해서 진실한 사람들만이 선택받을 수 있도록 해주시기를 부탁드린다"고도 했다.
총선 출마를 위해 나가는 경제 부총리를 대신해 한발 앞서 나갔던 장관을 도로 내각에 불러들였다.
하지만 지금은 프로 농사꾼과 프로 군인이 각각 제 몫을 해내야 나라도 지킬 수 있는 시대다.
각 분야마다 전쟁만큼이나 치열한 글로벌 경쟁이 매일매일 일어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선거라는 장터가 서면 이 내수 시장에 내놓을 상품을 여기저기 들쑤셔 뽑아가거나, 이참에 고령화 시대의
최대 로또 직업인 국회의원이 되어보겠다는 사람들로 각 분야가 들썩들썩하는 건 후진적 사회다.
지금 인천공항공사 홈페이지에 들어가면 CEO소개 코너에 "현재 '공석'입니다"하는 글귀와 함께 텅 빈 화면이 뜬다.
인천공항의 경영 목표가 '지속 가능한 공항기업'이라고 되어 있는데 아무래도 경영 목표를 바꿔야 할 듯싶다.
공항 경영이 아무나 해도 되고, 아무나 하다가 씹던 껌처럼 버리고 가도 되는 조직이 된 건 이전 정부에 없던 일이다.
기업을 이런 식으로 운영했다간 얼마 못 가 거덜나고 문 닫는다.
지금 이 시간도 인천공항, 김포공항을 비롯해 우리나라 공항들은 잠시라도 졸지 말고 비효율을 걷어내면서 새로운 손님을
붙들어와 상하이 공항, 두바이 공항 등 아시아의 허브 공항을 노리는 글로벌 공항들과 치열하게 경쟁해야 한다.
글로벌 경기 침체의 시대에 각 분야의 고수들이 나서도 될까 말까 한 상황이다.
박근혜 정부는 이 위기를 돌파 하겠다고 노동·공공·교육·금융 등 4대 개혁을 추진한다.
박 대통령은 "개혁은 선택이 아니라 우리 정부에 주어진 운명적 과제"라고까지 표현했다.
그런데 개혁이 거창하고 먼 데 있는 게 아니다.
똘똘하고, 책임감 있는 사람에게 자리를 맡겨 꾸준히, 지속적으로 경영 성과를 내게 하는 것만으로도 공공개혁은 절로 된다.
개혁 안 되는 것? 야당 탓만도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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