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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재천의 자연과 문화] [348] 세밑 온파

바람아님 2015. 12. 29. 07:43

(출처-조선일보 2015.12.29 최재천 국립생태원장·이화여대 석좌교수)


최재천 국립생태원장·이화여대 석좌교수 사진세밑 한파가 매섭지만 세밑 온파도 만만치 않다. 
이번 겨울 엘니뇨 덕분에 유난히 포근한 미국에서 가슴 따뜻한 얘기들이 들려온다. 
뉴욕 브롱스의 47지구대 경찰관들이 이번 크리스마스에 훈훈한 깜짝 이벤트를 연출했다. 
뒷좌석에 아이를 태우고 지나가는 차를 불러 세워 교통위반을 적발한 듯 다가가선 느닷없이 장난감을 
나눠줘 많은 부모를 울렸다. 
일주일 전쯤 미국 조지아 몬로 자치주 경찰서에 5000달러가 넘는 기부금이 들어왔다. 
경미한 교통법규 위반자들에게 범칙금 쪽지 대신 100달러 지폐를 나눠달라는 요청과 함께. 
뜻밖의 선물을 받은 시민들이 차에서 내려 경찰관을 끌어안는 진풍경이 벌어졌다.

2015년 대한민국의 세밑 거리. 유난히도 춥고 우울한 이 거리에서 나는 할 수만 있다면, 
아무리 두드려도 열리지 않는 취업의 문 앞에서 어깨를 떨군 이 땅의 모든 젊음에게 일일이 합격 통지서를 나눠주고 싶다. 
지금은 제법 학자랍시고 거들먹거리지만 나는 대학 시절 공부를 제대로 해본 적이 없다. 
그때는 다들 대충 건성건성 학교에 다녔다. 그래도 그때는 경제가 팽창하던 시절이라 대학만 나오면 그럭저럭 직장을 얻었다. 
그때에 비하면 요즘 학생들은 정말 열심히 공부한다. 그런데도 대학의 문을 나설 때 반겨주는 곳이 별로 없다. 
뭔가 잘못돼도 크게 잘못된 것 같다.

그리고 또 할 수만 있다면, 아직도 살아갈 날이 구만리 같은데 너무 일찍 거리로 내몰린 이 땅의 모든 퇴직자들에게도 
조촐하게나마 일할 곳을 찾아주고 싶다. 나는 여전히 일하고 싶고 그럴 능력도 있건만 어느새 정년이라며 집에 가란다. 
정년 제도, 도대체  누가 언제 만든 제도인지 모르지만 이제는 버릴 때가 된 듯싶다.

나는 안다. 어쩌면 내가 지금 앞뒤가 안 맞는 얘기를 하고 있다는 걸. 
정년 제도를 없애면 청년 실업이 더 심해질 수 있으니 말이다. 하지만 정말 그럴까? 
세상에서 제일 잘 사는 나라, 그래서 세밑 온파가 가슴을 적시는 나라 미국에는 정년 제도란 게 없다. 
길은 찾으면 있다. 내년에는 꼭 찾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