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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재천의 자연과 문화] [350] 곁쇠 교육

바람아님 2016. 1. 12. 09:40

(출처-조선일보 2016.01.12 최재천 국립생태원장·이화여대 석좌교수)


최재천 국립생태원장·이화여대 석좌교수미국 펜실베이니아 주립대에 유학하던 어느 날 다른 대학으로 떠나는 젊은 교수가 내게 수상한 열쇠를 
하나 건네주었다. 학과 건물의 모든 문을 열 수 있는 마스터 키(master key)라는데 몰골은 영 아니었다. 
그냥 곧바르고 매끈한 뼈대 끝에 작은 돌기 하나가 돋아 있는 열쇠였다. 
그런 밋밋한 열쇠로 뭐가 열릴까 싶었는데 그날 밤 나는 그 열쇠로 거의 모든 방을 기웃거릴 수 있었다. 
이렇듯 제 열쇠가 아닌데도 자물쇠를 열 수 있는 만능열쇠를 순우리말로 곁쇠라고 한다.

거의 모든 출입문에 설치되어 있는 원통형 자물쇠는 대개 납작한 뼈대에 오돌토돌 돌기들이 도드라진 
열쇠로 연다. 언뜻 생각하면 이 돌기들이 자물쇠의 움푹한 홈들과 결합해 잠금을 푸는 것 같지만, 
사실 돌기는 핀을 밀어 올려 아무 문이나 다 열리는 걸 방지한다. 
결국 문을 여는 건 돌기가 아니라 뼈대이다. 그래서 마스터 키를 '골쇠(skeleton key)'라고도 부른다.

인생 100세 시대를 살아갈 지금 청년 세대는 평생 직종을 적어도 대여섯 번이나 바꾸며 살 것이란다. 
대학에서 취업 관련 수업이나 듣고 스펙이나 쌓아본들 기껏해야 첫 직장을 얻는 데나 도움이 될 뿐이다. 
첫 직장의 문이나 열어주는 평범한 열쇠가 아니라 평생 여러 직장의 문에 꽂아볼 수 있는 곁쇠가 필요하다. 
하버드, 예일, 옥스퍼드 등 세계적 명문 대학들은 왜 사회 변화와 산업 수요에 맞춰 학과를 개편하기는커녕 수백 년 동안 
변함없이 인문학과 기초과학 위주로만 가르치고 있을까? 
인문학기초과학의 기반만 쌓으면 언제든 새로운 분야에 도전할 수 있다는 걸 그 대학들은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요행 어느 한 직장의 문이나 열려고 돌기투성이 열쇠 하나를 깎느라 대학 4년을 온전히 바치는 것은 참으로 손해 막심하고 
위험천만한 일이다. 
21세기형 4년제 대학에는 그 어느 때보다 '곁쇠 교육'이 필요하다. 
곁쇠의 뼈대가 바로 기초학문이다. '사회 수요 맞춤형 인재 양성'은 전문대학의 몫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