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조선일보 2016.01.12 최재천 국립생태원장·이화여대 석좌교수)
미국 펜실베이니아 주립대에 유학하던 어느 날 다른 대학으로 떠나는 젊은 교수가 내게 수상한 열쇠를
하나 건네주었다. 학과 건물의 모든 문을 열 수 있는 마스터 키(master key)라는데 몰골은 영 아니었다.
그냥 곧바르고 매끈한 뼈대 끝에 작은 돌기 하나가 돋아 있는 열쇠였다.
그런 밋밋한 열쇠로 뭐가 열릴까 싶었는데 그날 밤 나는 그 열쇠로 거의 모든 방을 기웃거릴 수 있었다.
이렇듯 제 열쇠가 아닌데도 자물쇠를 열 수 있는 만능열쇠를 순우리말로 곁쇠라고 한다.
거의 모든 출입문에 설치되어 있는 원통형 자물쇠는 대개 납작한 뼈대에 오돌토돌 돌기들이 도드라진
거의 모든 출입문에 설치되어 있는 원통형 자물쇠는 대개 납작한 뼈대에 오돌토돌 돌기들이 도드라진
열쇠로 연다. 언뜻 생각하면 이 돌기들이 자물쇠의 움푹한 홈들과 결합해 잠금을 푸는 것 같지만,
사실 돌기는 핀을 밀어 올려 아무 문이나 다 열리는 걸 방지한다.
결국 문을 여는 건 돌기가 아니라 뼈대이다. 그래서 마스터 키를 '골쇠(skeleton key)'라고도 부른다.
인생 100세 시대를 살아갈 지금 청년 세대는 평생 직종을 적어도 대여섯 번이나 바꾸며 살 것이란다.
대학에서 취업 관련 수업이나 듣고 스펙이나 쌓아본들 기껏해야 첫 직장을 얻는 데나 도움이 될 뿐이다.
첫 직장의 문이나 열어주는 평범한 열쇠가 아니라 평생 여러 직장의 문에 꽂아볼 수 있는 곁쇠가 필요하다.
하버드, 예일, 옥스퍼드 등 세계적 명문 대학들은 왜 사회 변화와 산업 수요에 맞춰 학과를 개편하기는커녕 수백 년 동안
변함없이 인문학과 기초과학 위주로만 가르치고 있을까?
인문학과 기초과학의 기반만 쌓으면 언제든 새로운 분야에 도전할 수 있다는 걸 그 대학들은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요행 어느 한 직장의 문이나 열려고 돌기투성이 열쇠 하나를 깎느라 대학 4년을 온전히 바치는 것은 참으로 손해 막심하고
위험천만한 일이다.
21세기형 4년제 대학에는 그 어느 때보다 '곁쇠 교육'이 필요하다.
곁쇠의 뼈대가 바로 기초학문이다. '사회 수요 맞춤형 인재 양성'은 전문대학의 몫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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