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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식의 북스토리] 나의 집은 어디인가

바람아님 2016. 3. 18. 12:40

(출처-조선일보 2016.03.06  김대식 KAIST 교수)


[김대식의 북스토리] 나의 집은 어디인가얼마 전 서울 대형 서점에서 경험했던 일이다. 
신간 문학 코너에서 이런저런 책들을 뒤적이고 있던 내 옆에서 흑인 아이 한 명이 열심히 책을 읽고 
있었다. 그것도 한글로 쓴 책을 말이다. 몇 발자국 옆 똑같이 검은 피부의 아버지는 – 자랑스러운? 
아니면 당혹한? – 눈빛으로 아이를 바라보고 있었다. 아버지는 읽을 수 없는 글을 읽는 아이. 
아이는 읽고 쓰는 글을 읽지도, 쓰지도 못하는 아버지. 이 먼 한국에 무슨 사연으로 온 걸까? 
우리의 역사도 전통도 모르는 아이는 그 책을 진정으로 이해할 수 있을까?

30년 전. 독일 어느 서점에서 나는 열심히 독일 고전들을 읽고 있었다. 괴테, 실러, 칸트, 
쇼펜하우어. 내가 책에 빠져 현실을 잊고 있을 때, 나를 바라보던 누군가는 생각했을 것이다. 
이 먼 독일에는 무슨 이유로 온 걸까? 저 동양 아이는 독일인의 철학을 진정으로 이해나 할 수 있을까? 

줌파 라히리는 인도 서뱅골 출신 부모님 아래 런던에서 태어났다. 
두 살 때 미국으로 이주해 보스턴 대학에서 문학을 전공한다. 
첫 작품 “축복받은 집”은 풀리처상을 받고 2002년엔 구겐하임재단 장학금을 받는다. 
뱅골어를 들으며 자란 이민자의 딸이 그 누구보다 뛰어난 영어로 글을 쓰고, 말하고, 생각하는 영미권 최고의 작가가 된 것이다. 
그러던 어느 날. 라히리는 영어를 포기한다. 
2012년 가족과 함께 이탈리아로 이주한 그녀는 더 이상 영어를 읽지도, 쓰지도, 말하지도 않기로 결심한다. 
처음 배워가는 이탈리아어. 마치 초등학생 같이 다시 글쓰기를 배우기 시작한다. 왜 그녀는 영어를 포기한 것일까? 
더 이상 인도도, 방글라데시도 아닌 고향 뱅골. 부모의 고향 뱅골이 아닌 영국에서 태어났지만, 자라고, 세상을 알게 된 곳은 
미국. 그런 그녀의 가슴 속 고향은 과연 어디일까? 왜 이탈리아어냐고? 왜 이탈리어면 안 되느냐고 되물어볼 수 있겠다. 
영어도, 뱅골어도 그녀의 선택이 아니었다. 
하지만 초등학교 수준의 이탈리어어만큼은 적어도 라하리 그녀 자신이 스스로 선택한 언어이기 때문이다.

[김대식의 북스토리] 나의 집은 어디인가9가지 짧은 이야기들을 모은 “축복받은 집”
그다지 큰 불행도, 행복도 없다. 
하지만 읽으면 읽을수록 슬퍼진다. 
아니, 슬픔이 아니다. 
단지, 행복의 불가능을 느낄 뿐이다. 
태어나고 자란 곳; 얼마 전 방송되었던 “응답하라 1988”에서의 어린시절 같은. 
우리는 영원히 그런 시절과 고향을 그리워하지만, 
우리의 고향과 어린시절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아니, 어쩌면 한 번도 존재하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라히리의 책은 이루어질 수 없는 인간의 행복을 노래한다. 
그것도 너무나 아름다운 목소리로 말이다. 

줌파 라히리
“축복받은 집”, 2013, 마음산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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