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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식의 북스토리] 움베르토 에코 기획 <중세>. 문명과 미개의 차이

바람아님 2016. 3. 15. 07:01

(출처-조선일보 2016.02.21 김대식 KAIST 전기 및 전자과 교수)


[김대식의 북스토리] 움베르토 에코 기획 <중세>. 문명과 미개의 차이움베르토 에코가 기획한 책 <중세>. 거의 1000쪽이나 되는 정말 두꺼운 책이다. 
그런데 이게 다가 아니란다. 총 4권으로 기획된 책들 중 이제 겨우 첫 2권이 출간되었으니, 
전체 컬렉션이 다 출간되면 4000페이지 정도의 책이 된다. 
중세기에 대해서 도대체 무슨 할 이야기가 그렇게도 많은걸까? 
그것도 화성으로 우주선을 보내겠다는 2016년에 말이다.

<중세>는 이탈리아 석학이자 소설가인 움베르토 에코가 기획하고 
수백명에 이르는 최고의 중세기 전문가들이 참여한 작품이다. 
<장미의 이름>으로 글로벌 스타가 되기도 한 에코는 사실 기호학자이며 중세 스콜라 철학 전문가다.

왜 하필 중세 철학일까? 어쩌면 중세기야말로 기호학 최고의 전성시대라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고대 그리스로마인들은 경험과 행복, 그리고 이 세상에서의 성공을 추구했지만 중세는 죽음과 기호의 문명이었다.

영원할 것만 같던 제국의 수도 로마가 410년 서고트족에게 점령되자 그리스로마인들은 존재적 혼란에 빠진다. 
로마마저 영원하지 않다면 삶과 존재에 무슨 의미가 있을까? 
북아프리카 도시 히포 레기우스의 주교였던 아우렐리우스 아우구스티누스(성 아우구스티누스)는 극단적인 해답을 제시한다. 
삶의 본질은 이 세상이 아닌 저 세상에 있다고.

신의 제국(civitate dei)은 눈에 보이는 로마가 아닌 보이지 않는 진정한 예루살렘에 있다고. 
로마는 점령당할 수도, 지구에서 사라질 수도 있다. 어차피 무의미한 사실이다. 
그러나 나의 영생, 그리고 죽음이라는 강을 넘었기에 이별해야만 했던 사람들과의 만남은 진정한 ‘신국’인 
저 세상 예루살렘에서만 가능하다.

존재의 본질이 직접 경험할 수 없는 세상에서만 가능하다면 고대 철학자들이 추구하던 실험과 경험은 무의미해진다. 
기호학과 논리를 통해 성경을 제대로 해석하는 것이야말로 인간에게 주어진 유일한 진실과 진리의 길이라는 말이다.

눈에 보이는 세상의 멸망이 가져온 보이지 않는 세상에 대한 집착. 
기원후 5세기부터 16세기까지 중세 역사의 핵심이라고 볼 수 있다. 
고대 그리스로마가 추구하던 이성, 경험 그리고 개인의 자유와 행복이 비참하게 무너져버린 5세기에서 10세기, 
찬란한 이슬람 문명과 멸망해가는 비잔틴 제국의 영향을 받았던 10세기에서 13세기, 
독창적인 유럽 문명을 탄생시킨 13세기에서 15세기. 
그리고 드디어 서서히 다시 이성과 개인의 행복을 되찾기 시작한 15세기에서 16세기.

[김대식의 북스토리] 움베르토 에코 기획 <중세>. 문명과 미개의 차이
1000년이 넘는 이 방대한 역사를 설명하기에 4000 페이지는 사실 그다지 많은 것이 아니다. 
중세사 최고의 책으로 꼽히는 독일 dtv 출판사의 “Lexikon des Mittelalters”(중세기 사전)은 
9권으로 나누어 총 9,900 페이지나 되니 말이다.

우리는 왜 중세를 이해해야 하는가? 
문명이 다시 야만으로 쇠퇴하고, 개인의 자유와 행복이 추상적인 이데올로기에 억눌리는 세상. 
2016년 오늘 세상 곳곳에서 ‘중세’는 여전히 끝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움베르토 에코 (기획)
중세, 2015, 시공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