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 8일 '세계 여성의 날'을 쇤 지 이틀 만에 우리는 대한민국 최초의 여성 대통령을 탄핵했다. 지난 92일간 TV에 헌법재판소 영상이 나올 때마다 나는 조용히 감회에 젖곤 했다. 2005년 1월 호주제 위헌 심리 제5차 마지막 변론에 불려나가 자연을 연구하는 과학자로서 호주제가 왜 보편적인 자연현상이 아닌가에 대해 설명했다. 공작새는 본 적이 있겠지만 극락조, 코끼리바다표범, 대눈파리가 어떻게 생겼는지 모를 것 같은 재판관님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 헌재 역사상 최초로 파워포인트를 사용해 15분짜리 강의를 했던 기억이 새롭다. 물론 이번 대통령 탄핵 심리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그때도 찬반 시위가 만만치 않았다.
호주제 폐지가 하루아침에 이 땅에 남녀평등 시대를 열어젖힌 건 아니지만 여권 신장의 결정적 계기를 마련해준 것은 분명해 보인다. 2003년에 출간한 '여성시대에는 남자도 화장을 한다'에서 나는 우리나라가 미국보다 먼저 여성 대통령을 추대할 것이라는 사뭇 대담한 예언을 내놓았다. 당시에는 아직 정치인 박근혜의 존재감이 그리 대단하지 않던 시절이었다. 이어진 저자 특강에서 나는 미국인들이 여성에게 나라를 맡기느니 차라리 흑인 대통령을 먼저 세우리라는 예언도 꺼내놓았다. 미국 여성은 흑인보다 무려 50년이나 뒤늦게 선거권을 얻었다.
마치 돗자리라도 깐 듯 내 예언은 그대로 들어맞았다. 2009년 버락 오바마가 미국 최초의 흑인 대통령이 되었고 2013년 우리나라는 드디어 여성 대통령을 선출했다. 대통령은 고사하고 여성 부통령도 한번 세워보지 못한 미국은 지난 대선에서 끝내 여성 대통령이 못 미더워 결국 최악의 대통령을 뽑고 말았다. 나는 지금 우리가 미국보다 훨씬 의젓한 민주주의를 구현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이번 탄핵이 결코 여성 대통령의 실패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우리가 대통령으로 뽑은 여성이 실패했을 뿐이다. 이번 민주 혁명도 여대생들의 혜안과 용기에서 비롯되었다. 몰라보게 성숙한 민주국가 대한민국이 자랑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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