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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우정 칼럼] 공백의 100일

바람아님 2017. 5. 3. 07:39

(조선일보 2017.05.03 선우정 논설위원)


아베 총리는 훨씬 먼저 한반도 위기를 알았다

100일 동안 구축한 미·일 정상의 新밀월

그들은 우리 운명에 대해 뭐라고 속삭이는 걸까


선우정 논설위원아베 신조 일본 총리가 얼마 전 한국에서 비판을 받았다. 

한반도에서 전쟁이 발생했을 때 일본에 유입되는 난민을 스크린해 받아들이겠다는 국회 발언 때문이다. 

한반도 전쟁 상황을 가정하고 난민을 선별하겠다는 것이 우리에겐 자극적이고 비인도적으로 들릴 수밖에

없었다. 북한의 핵실험 준비 움직임이 포착되고, 미 항공모함이 접근하면서 실제로 위기가 고조되던 

시기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거슬러 올라가면 뜻밖의 사실을 알게 된다. 

일본 정부가 한반도 난민 대책을 검토하기 시작한 게 이미 두 달이 넘었다는 것이다. 이 사실은 4월 중순 일본 언론에 

보도됐다. 아베 총리의 문제 발언은 언론의 난민 보도에 대한 일본 국회의 질의 과정에서 나왔다. 

보도에 따르면 일본 정부가 국가안전보장회의(NSC)를 열어 난민 문제를 다룬 건 지난 2월 23일이다. 

일본 언론은 미·일 정상회담 후속 대책처럼 보도했다. 정상회담은 2월 10~11일 이틀간 미국에서 열렸다. 

열흘 후 한반도 전쟁을 대비한 난민 대책을 검토했다는 것은 아베 총리가 정상회담 과정에서 한반도 군사 충돌 가능성을 

인식했다는 것을 시사한다. 일본 정부가 지방자치단체와 공동으로 한반도 난민 대비 매뉴얼을 만든 건 2001년이다. 

먼지를 뒤집어쓴 서류철을 16년 만에 꺼내 재검토에 들어간 것이다. 

아베 총리는 한반도 운명에 대해 트럼프 대통령과 대체 무슨 이야기를 나눈 것일까.


일본 정부는 NSC 회의에서 난민 외에 한반도에 있는 일본인 5만여명의 피난 대책도 논의했다. 한국만이 아니다. 

일본 정부가 생존해 있다고 믿는 납북(拉北) 일본인 구출 대책도 포함됐다. 

사실 휴전선이 터졌을 때 난민 문제는 우리에게 훨씬 큰일이다. 일본에 유입되는 난민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것이다. 

아베 총리의 선별 발언은 난민으로 위장한 북한의 무장(武裝) 게릴라를 걸러내겠다는 뜻이다. 

이미 유럽이 이 문제로 심각한 피해를 보고 있다. 우리도 예외가 아니다. 

전쟁 상황에 직면한 자국민을 안전하게 귀국시키는 것 역시 국가의 의무다. 이를 구실로 군사 진출을 노리지 않는다면 

불안 심리를 자극한다는 이유만으로 일본을 탓할 수 없다. 반대 입장이라면 우리도 그래야 한다.


좀 더 주목해야 할 문제는 일본 정부의 논의가 난민 수용과 자국민 안전 대책에 멈췄을까 하는 점이다. 

몇 년 전 "일본이 전쟁할 수 있는 나라가 됐다"며 시끄러웠던 적이 있다. 

미국의 지지 아래 '집단적 자위권'을 인정한 것이다. 

이로써 일본은 제한된 범위에서 해외에서도 동맹국인 미국의 전쟁에 참여할 수 있게 됐다. 

일본은 이전에도 '가이드라인'이란 이름으로 한반도 유사시 군사적 후방 지원을 미국과 합의했다. 

1994년 한반도 위기 때 미국은 일본에 미 함대 호위와 기뢰 제거를 요구한 일이 있다. 

'집단적 자위권'은 일본의 군사적 행동반경을 크게 넓혔다. 

일본 정부는 이번 위기에서 이 범위를 구체적으로 정해 미국과 논의했을 가능성이 있다. 아베 총리라면 그랬을 것이다. 

한반도 유사시 일본의 참전(參戰) 범위는 전쟁의 성격을 바꿀 수 있을 만큼 민감한 사안이다. 

미국은 그 민감성을 잘 모른다. 과거에도 일본은 미국의 이런 무관심을 활용해 한반도에 대한 영향력을 확대했다. 

이 전략은 지금도 유효하다고 본다. 

우리 정부는 지금 일본의 전략을 얼마나 파악하고 미·일 논의에 얼마나 관여하고 있을까.


일본만큼 후각과 촉각이 발달한 나라가 없다. 세상 변화를 빠르게 감지하고 섬세하게 접촉해 유리한 방향으로 이끈다. 

특히 서양인의 심리를 다루는 데 놀라운 재주가 있다. 트럼프 대통령 취임 후 100일도 마찬가지였다. 

아베 총리는 주요국 정상 중 가장 먼저 트럼프 대통령과 정상회담을 가졌다. 

두 번째 만찬 직후 북 미사일 도발을 비판한 긴급 기자회견 장면은 아베 총리가 주(主), 트럼프 대통령이 객(客)으로 연출됐다. 

27홀 골프 시합보다 훨씬 상징적이다. 

트럼프 대통령은 미·중 정상회담 전후에도 아베 총리와 전화로 상의했다. 

직전엔 35분, 직후엔 45분간 이어졌다. 

아베 총리는 트럼프 대통령의 귀를 선점한 듯하다. 백여 년 전처럼 한반도 미래를 귓속말로 속삭이고 있다.


미 대통령 취임 후 100일은 동맹국에 가장 중요한 시간이다. 한국은 그 시간을 놓쳤다. 

새 대통령은 미·일 정상이 구축한 '밀월(蜜月)' 관계에 뒤늦게 끼어들어 한반도 문제의 주객(主客)을 정상으로 돌려야 한다. 

상대는 트럼프와 아베다. 그들은 앞으로 선출될 한국의 새 대통령이 어떤 모습으로 다가오길 원할까. 

동북아의 조정자일까, 동맹의 파트너일까. 

이 뻔한 답부터 제대로 내려야 우리 운명이 남의 손에 흔들리는 것을 막을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