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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석주의 사물극장] [3] 오르한 파무크와 '아버지의 여행 가방'

바람아님 2017. 7. 14. 08:55
조선일보 2017.07.13. 03:10

사물은 생의 불가피한 동반자다. 산다는 것은 우리의 필요와 욕망에 부응하는 사물과 함께하는 일이다. 사물은 먹고 자는 것과 더불어 생의 필요조건이다. 우리 생애 주기와 사물의 사용 주기는 포개진다. 어떤 사물은 과거의 기억을 여는 끄나풀이다. 노벨 문학상을 받은 터키 소설가 오르한 파무크(65)는 수상 연설에서 아버지의 여행 가방 이야기를 꺼낸다.

파무크는 이스탄불 공과대학에서 건축학을 공부하다 돌연 그만둔다. 22세 때 소설가가 되기로 결심하고 4년 만에 첫 소설을 써낸다. 이 소설의 첫 독자였던 아버지는 아들을 껴안으며 "너는 언젠가 노벨 문학상을 받게 될 거다"라고 속삭인다. 아버지의 뜨거운 부정(父情)과 염원이 담긴 이 예언은 들어맞는다. 파무크의 소설들은 42개 국어로 번역되고, 그는 2006년 노벨 문학상을 받는다.


파무크의 아버지는 한때 소설가 지망생이었다. 소설 쓰기는 "바늘로 우물 파기"를 하는 것이다. 아버지는 책상 앞에 몇 달 몇 년을 하염없이 앉아 있기보다 친구와 놀기를 더 좋아하는 한량이었다. 그는 사교 생활에 바쁘고, 늘 재미와 즐거움을 좇으며 산다. 세월이 흘러 유명 소설가로 우뚝 선 아들에게 아버지는 당신의 글과 시 몇 편, 단상을 적은 공책으로 가득 찬 빛바랜 여행 가방을 건넨다.


파무크는 여행 가방을 집필실에 두고 망설인다. 가방 안 물건은 아버지의 과거, 비밀, 인생 그 자체일 테다. 파무크는 이 판도라 상자에 담긴 새로운 삶의 진실과 마주치는 데 두려움을 품는다. 우리는 누구나 자신만의 판도라 상자를 하나씩 품고 산다. 열 것이냐, 말 것이냐. 그게 골칫거리인 것은 생의 또 다른 진실과 마주치는 일이기 때문이다.


장석주 시인·문학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