人文,社會科學/敎養·提言.思考

[신상목의 스시 한 조각] [5] 韓·日 합작품 '차쿠리키'

바람아님 2018. 1. 5. 09:12

(조선일보 2018.01.05 신상목 기리야마본진 대표)


차력(借力)이라는 말이 있다.

요즘은 머리로 벽돌을 깨거나 몽둥이로 몸을 강타해도 멀쩡함을 과시하는 신체 학대 퍼포먼스 정도의 이미지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원래는 오랜 역사를 지닌 전통 무예이자 심신 단련법이었다. 대자연의 '힘을 빌려' 기공(氣功)을 연마하고

심신을 단련하는 것이 차력의 본래 의미이다. 입산수도(入山修道)로 내공을 쌓은 도사(道士)가 바로 차력의 달인이다.

차력은 택견처럼 한반도 고유의 것으로, 중국이나 일본에서는 볼 수 없는 독특한 우주관에 바탕을 두고 있다고 한다.


[신상목의 스시 한 조각] [5] 韓·日 합작품 '차쿠리키'


차력은 최배달과 역발산 등에 의해 일본에 소개되었는데, 일본어 발음은 '차쿠리키'이다.

借의 발음은 しゃ(샤) 또는 しゃく(샤쿠)이며, ちゃく(차쿠)로 읽는 경우는 차쿠리키가 유일하다.

한국어 발음인 '차력'의 영향이 남아 '차쿠리키'라는 하이브리드 발음이 된 것으로 추정된다.

일본의 영향으로 유럽에서는 차력이 'Chakuriki'로 알려져 있다.

일본 격투기 K-1의 한 시대를 풍미한 피터 아츠가 속한 도장의 이름이 'Chakuriki Gym Amsterdam'이다.


반대의 경우도 있다. 한국 군대에서 야전에서 총기를 서로 기대어 세워놓는 것을 '사총'이라고 한다.

구(舊)일본 육군 교범에는 '사주(叉銃)라는 말이 있다. 말 그대로 총을 교차시켜 세워놓는다는 뜻인데, 일본 군대 용어가

아직까지 한국 군대에 남아있는 경우다. 한국어 발음은 차총이지만 일본 발음 '사'와 한국어 발음 '총'이 결합하여

'사총'이라는 하이브리드 발음이 된 것으로 추정된다.


일제 잔재라며 분개하고 혀를 차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언어는 고립되어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이(異)문화 간 접근에 의해 생명력을 부여받고 침투력과 면역력의 상호작용 속에서 살아 움직인다.

유럽어는 서로 물고 물리는 언어의 격전을 거치며 진화해 왔다.

'차쿠리키'와 '사총'은 그러한 맥락에서 의미를 되짚어 보아도 좋을 것이다.

비단 말뿐이겠는가. 국가, 민족(의식)의 형성과 생존이 다 그런 것이 아닌가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