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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 박준의 酒방] 끝까지 푸짐한 어복쟁반 속엔 백석의 詩와 평안북도의 겨울이

바람아님 2018. 2. 3. 17:37

(조선일보 2018.02.03 시인 박준)


[시인 박준의 酒방] 서울 갈현동 만포면옥


평안북도가 고향이어서인가
백석의 시엔 겨울이 잦다
면수로 시작, 메밀면으로 끝나는 어복쟁반처럼
추위 대신 온기가 담겨있다


만포면옥의 어복쟁반


어떤 날씨는 오랫동안 책장에 꽂혀 있던 시집을 다시 꺼내게 한다.

땅과 하늘이 풀리는 봄날에는 김용택 시집 '맑은 날'을 펼쳐들 때가 많고, 날이 푹푹 찌는 여름날에는 이성복 시집

'그 여름의 끝'을 읽게 된다. 가을에는 어떤 시집이든 반갑다.

물론 이것은 내 오래된 고정관념 중의 하나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요즘처럼 북서풍이 매서운 날에는 '백석 전집'을 자주 펼친다.

우리말과 방언이 얼마나 아름다울 수 있는지, 그리고 이 말을 부리는 사람의 마음결이 얼마나 고울 수 있는지 증명해낸

시인 백석. 그의 시에는 유독 겨울이 잦다. 아마 이것은 시인의 고향, 평안북도 정주(定州)의 긴 겨울과도 관련이 깊을 것이다.


즐거운 것은 겨울을 배경으로 삼은 백석의 작품들에는 추위 대신 온기가 가득하다는 것이다.


이 온기는 함께 살아가는 사람들, 그리고 그들과 나누어 먹는 음식들에서 흘러나오는 경우가 많다.

"졸음이 오면 아릇목싸움 자리싸움을 하며 히드득거리다 잠이 든다.

그래서는 문창에 텅납새의 그림자가 치는 아침 시누이 동세들이 욱적하니 흥성거리는 부엌으론 샛문 틈으로 장지문틈으로

무이징게국을 끓이는 맛있는 내음새가 올라오도록 잔다."('여우난골족')


'백석 전집'은 마치 평안도의 향토 음식 사전을 보는 듯하다.

그는 '호박잎에 싸오는 붕어곰'이 언제나 맛있다고 했다.

'돌나물김치에 백설기'를 좋아했고 '달디단 물구지우림 둥굴레우림'을 생각하고 '김치 가재미선 동치미가

유별히 맛나게 익는 밤'에도 '아직 멀은 도토리묵 도토리범벅'을 그리워했다.


내가 백석을 떠올리기도 하며 찾는 곳. 겨울이면 더 발길이 잦아지는 곳.

평안도가 아닌 서울 은평구 갈현동의 만포면옥.

혼자 갈 때는 평양냉면에 녹두지짐이나 만두를 먹는 것이 보통이지만

좋아하는 사람들과 함께할 때는 꼭 어복쟁반을 시키게 된다. 컵을 두 손으로

쥐고 뜨거운 면수를 홀짝이고 있다 보면 어느덧 어복쟁반이 등장한다.

육수와 함께 소고기 편육과 버섯, 양파, 쑥갓, 대파, 계란 지단 등이

풍성하고 보기 좋게 담겨온다.


평안도와 평양 사람들이 즐겨 먹는다는 이 음식에

왜 어복이라는 이름이 붙었는가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하다.

어복쟁반에 들어가는 고기는 소의 가슴살을 주로 사용하는데 이때의 우복(牛腹)이 잘못 발음됐다는 말도 있고,

소고기 대신 생선 내장을 넣는 경우가 있어 그렇다는 설도 있다.

유래야 어떻든 간에 어복쟁반은 함께하는 음식이다. 육수를 몇 번이고 더 부어가며, 버섯과 야채를 추가해가며,

국자로 앞에 앉은 사람의 접시에 고기 몇 점을 더 올려주며.


만포면옥에서 어복쟁반은 끝까지 푸짐하다.

건더기를 다 건져 먹고 국물이 자작해질 때쯤 메밀사리를 추가해 온면으로 먹을 수 있다.

메밀면을 두고 "이 조용한 마을과 이 마을의 으젓한 사람들과 살틀하니 친한 것은 무엇인가 이 그지없이 고담하고

소박한 것은 무엇인가"('국수') 라고 했던 백석을 다시 한 번 떠올려가며.


만포면옥(02-389-3917), 어복쟁반 小(4만원), 냉면(1만원), 녹두지짐 小(5000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