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조선일보 2011.04.01 주경철 서울대 교수·서양근대사)
일제(日帝)는 진주만 기습공격(1941)을 감행하여 미국의 태평양 방면 군사력을 무력화시킨 다음 동남아시아 각지를 정복할 수 있었다. 그렇지만 이는 잠자는 사자를 깨운 것과 다름없었다. 곧 전력을 회복한 미국은 미드웨이 해전(1942년 6월)에서 대승을 거둔 이래 태평양 전쟁의 주도권을 쥐고 일제를 압박해 들어갔다. 1944년 7월에 이르면 수천 명의 민간인이 절벽에서 떨어져 자살하는 참극을 겪으며 사이판이 점령되었다. 이제 일본 본토를 직접 폭격하는 것이 가능해졌다. 일본군은 어떻게 해서든 미국의 항공모함이 일본 열도에 접근하는 것을 막으려 했지만, 일본 전투기는 양과 질에서 미국 전투기의 적수가 못 되었다. 그러던 차에 일본 폭격기 한 대가 구름이 잔뜩 낀 날씨 덕분에 적에게 들키지 않고 다가가 자살 공격을 시도하여 항공모함 프랭클린 호를 파손시켰다. 이를 보고 오니시(大西) 중장이 생각해 낸 것이 가미카제 특공대였다.
1944년 10월에 결성된 특공대는 첫 번째 자살공격에서 항공모함 세인트 로 호를 침몰시킴으로써 대성공을 거두었다. 이륙 장치만 있고 착륙 장치가 없는 특수 비행기들이 폭탄을 탑재한 후 날아가 목표물 40km 앞에서 분산한 다음 수직으로 내리꽂히듯 달려들었다. 미국 선박들은 30초 안에 방공포로 이 비행기들을 격추시켜야 했지만, 이는 지극히 힘든 일이었다. 그리하여 초기의 가미카제 공격은 상당한 전과를 올렸다.
그러나 이런 식의 공격이 계속 성공을 거둘 수는 없었다. 곧 미국 전함의 방공 능력이 개선되었고, 미국 전투기들은 폭탄을 최대한 탑재하여 속도가 느려진 일본 비행기들을 쉽게 격추시켰다. 게다가 가미카제 공격의 파괴력이 생각만큼 그렇게 강하지도 않았다. 구축함 라페이 호는 4대의 비행기가 날아와서 충돌했지만 파괴되지 않았다. 더구나 시간이 갈수록 숙련된 조종사들이 사라져갔고, 연료도 부족해졌다. 급기야 오키나와에서는 글라이더에 폭탄을 탑재하여 미군 함정에 달려드는 한심한 방식까지 시도했는데, 일본군은 이를 '오카(櫻花, 벚꽃)' 폭탄이라 불렀지만 미군은 '바카(馬鹿, 바보)' 폭탄이라고 놀려댔다. 모두 5000번이나 감행한 가미카제 공격은 엄청난 희생에도 불구하고 전함 35척을 침몰시키는 데에 그쳤다. 전쟁이든 다른 영역에서든 '결사대'라는 것은 효율적인 방식과는 거리가 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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