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조선일보 2010.10.18. 최재천 이화여대 석좌교수·행동생태학)
"나귀가 걷기 시작했을 때 동이의 채찍은 왼손에 있었다. 오랫동안 아둑시니 같이 눈이 어둡던 허생원도 요번만은 동이의 왼손잡이가 눈에 띄지 않을 수 없었다." 이효석의 '메밀꽃 필 무렵' 맨 마지막 대목이다. 소설에서는 허생원의 "걸음도 해깝고 (나귀의) 방울 소리가 밤 벌판에 한층 청정하게 울렸다"는 표현으로 동이가 허생원의 친자임을 암시했지만, 허생원이 만일 요즘 사람이라면 은근슬쩍 동이의 머리카락 몇 올을 뽑아 DNA 검사를 의뢰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요즘은 가히 'DNA 신봉시대'라 해도 지나침이 없어 보인다. 강간이나 살인 사건을 담당하고 있는 검사가 법정에서 백일불공 끝에 혹은 하느님께 무릎 꿇고 기도하는 가운데 피고인이 범인이라는 계시를 받았다고 말한들 그걸 받아들일 판사는 단 한 사람도 없을 것이다. 그러나 DNA 검사 결과를 제시하면 누구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다. 적어도 법정에서는 DNA의 권위가 신의 권위를 능가한 셈이다.
인간유전체프로젝트(HGP)에 의하면 우리 인간은 약 3만개의 유전자를 갖고 있는데, 이는 30억개의 염기쌍으로 이루어져 있는 DNA 전체의 약 1%밖에 되지 않는 분량이다. 나머지 99%의 DNA는 단백질 제작에 관여하지 않고 있어 한때는 '쓰레기 DNA(junk DNA)'라고 불렀다. 친자 확인이나 범죄 수사의 DNA 지문검사는 바로 이 쓰레기 DNA의 개인차를 찾아내는 검사이다. 그동안 생물학자들의 연구에 따르면 이 부분의 DNA는 염기쌍 1000개 중 하나꼴로 돌연변이가 일어나기 때문에 개인의 유전체 전체를 분석할 필요는 없고 그저 13~20개의 특정좌위만 비교하면 99.9999%의 확률로 개인 식별이 가능하다.
조선시대 법의학서 '무원록(無寃錄)'에는 부모의 두개골에 피를 떨어뜨려 그냥 흘러내리지 않고 스며들면 혈육으로 판명했다고 적혀 있다. 그리 과학적이지도 않고 일부러 몸에 상처를 내어 피를 흘리게 만들어야 했던 이 방법과 달리 요즘엔 부드러운 면봉으로 입 안을 한번 훑어주기만 해도 하루면 DNA 검사 결과가 나온다. 접근이 쉽지 않은 야생동물의 경우에는 주로 분변을 수거하여 검사한다. DNA 검사법이 개발된 이후 생물학자들은 요사이 숲 속에서 똥 줍느라 바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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