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조선일보 2010.10.11. 최재천 이화여대 석좌교수·행동생태학)
행복이 고통 앞에 무릎을 꿇었다. 전업주부로 살다가 30대 후반에 카피라이터로 사회생활을 시작하여 활발한 강연과 집필 활동을 하며 '행복전도사'를 자처하던 최윤희씨가 남편과 함께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700가지 통증에 시달려본 분이라면 저의 마음을 조금은 이해해 주시리라 생각합니다"라며 구차한 '삶의 질(well-being)'을 포기하고 그 나름의 '죽음의 질(well-dying)'을 선택한 것이다.
고통은 철학의 중심 주제 중의 하나이다. 특히 인간 경험의 본질과 흔히 '감각질'이라고 번역하는 퀄리아(qualia)에 관한 논의의 핵심 요소이다. 데카르트는 동물은 의식을 갖고 있지 않기 때문에 고통도 느끼지 못한다고 주장했다. 실제로 미국 수의과대학에서는 1989년까지도 동물의 고통은 일단 무시하라고 가르쳤다. 그러나 이제 우리 동물행동학자들은 이 세상 많은 동물도 나름대로 고통을 느낀다는 걸 충분히 관찰했다. 개나 고양이를 기르는 사람 중 많은 이들은 학자들의 이 같은 논쟁에 아랑곳하지 않고 자신이 사랑하던 동물이 고통스러워하는 모습을 견디지 못해 안락사를 선택하기도 한다.
진화적으로 볼 때 고통은 생물의 삶을 보호해주는 적응 현상이다. 통증을 유발하는 자극은 우리 몸에서 곧바로 반사작용을 일으키고 다시는 그런 위험한 상황에 놓이지 않도록 우리 마음을 훈련시킨다. 선천적으로 통증을 느끼지 못하게 태어난 환자는 성냥불에 손가락이 타들어가도 눈으로 확인하기 전에는 모른다.
우리는 모두 고통 없는 행복한 세상을 꿈꾼다. 그러나 고통이 사라진다 해서 반드시 행복한 삶이 시작되는 것은 아니다. 고통의 원인은 해결하지 않은 채 고통 그 자체를 없앤다고 과연 이 세상이 더욱 행복해질까? 아니, 그렇지 않을 것이다. 고통 없는 세상이 오면 지금보다 훨씬 많은 사람이 일찍 세상을 떠나거나 허구한 날 병원에 누워 있을 것이다. 고통은 분명히 소중한 진화의 산물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치통, 통풍, 또는 루푸스(lupus)로 인한 고통처럼 참을 수 없을 정도로 극심한 고통은 도대체 왜 존재하는 것일까? 최윤희씨는 생전에 "'자살'을 뒤집으면 '살자'가 된다"고 외쳤지만, 고통(苦痛)은 아무리 뒤집어도 여전히 통고(痛苦)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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