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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재천의 자연과 문화 [83] 소통

바람아님 2013. 11. 23. 23:26

(출처-조선일보 2010.11.01 최재천 이화여대 석좌교수·행동생태학)


세계 최고 수준의 정보통신 국가에서 소통이 문제라니 이 무슨 기막힌 모순인가? 소통의 원활함이 통신 수단의 발달에 정비례하는 것은 아닌 모양이다. 나는 동물행동학자이다. 내가 하는 동물행동학이란 따지고 보면 결국 동물들의 의사소통을 연구하는 학문이다. 그들의 행동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그들과 소통만 가능하면 직접 물어보며 밝힐 수도 있고, 그들 사회의 모든 관계들도 그들 간의 의사소통 메커니즘만 파악하면 그리 어렵지 않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동물들의 의사소통에는 대충 네 가지 종류가 있다. 촉각·후각·시각·청각에 의한 소통이 그들이다. 우리 인간은 이 중에서 특별히 시각과 청각에 의존하는 동물이지만, 이 세상 절대다수의 동물들은 주로 후각을 이용하여 의사소통을 한다. 인간도 제한적이나마 후각을 사용한다. 남성에 비하면 여성들이 훨씬 더 후각에 의존하는 편이다. 나는 아무렇지도 않은데 현관에 들어서자마자 아내는 대뜸 발부터 씻으라고 성화를 댄다.

요사이 밤마다 구성지게 울어대는 귀뚜라미는 우리 못지않게 청각을 사용하는 대표적인 동물이다. 허구한 날 초저녁부터 울기 시작한 녀석이 새벽녘까지 울어댄다. 실제로 관찰해보니 어떤 녀석은 하룻밤에 무려 11시간을 운다. 귀뚜라미는 윗날개를 서로 비벼 소리를 낸다. 만일 당신이 팔을 뒤로 한 채 서로 엇갈리게 움직이는 운동을 11시간 동안 계속한다고 상상해보라. 실로 엄청난 노동이다. 그렇다면 귀뚜라미 수컷들은 밤마다 왜 그리도 끔찍한 육체노동을 하는 것일까? 암컷 귀뚜라미들이 쉽사리 그들이 부르는 세레나데에 넘어와 주지 않기 때문이다.


동물 세계에서 보면 소통이란 원래 잘 안 되는 게 정상처럼 보인다. 동물행동학은 한때 의사소통을 "서로에게 이로운 정보를 교환하는 행동"이라고 정의했었다. 하지만 이제 우리 동물행동학자들은 의사소통을 기본적으로 일방적인 설득의 노력 또는 심지어는 속임수로 이해한다. 소통이란 소통을 원하는 자가 소통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 일방적으로 끊임없이 노력해야 하는 관계이다. 툭하면 소통이 안 되다고 하소연하는 우리 정부의 푸념은 소통의 근본을 모르는 처사이다. 국민이 이해할 때까지 수천 번이라도 설명과 설득을 반복해야 한다. 11시간이나 날개를 비벼대는 귀뚜라미 수컷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