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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경철의 히스토리아 [113] 베이비 박스

바람아님 2013. 11. 23. 23:32

(출처-조선일보 2011.06.03 주경철 서울대 교수·서양근대사)


오늘날 우리는 아이들을 천사처럼 아름답고 소중한 존재로 여기지만 과거에는 사정이 전혀 달랐다. 백 년 정도만 거슬러 올라가면 지금과는 전혀 딴판인 세계가 펼쳐져 있었다. 많은 아이들은 집이나 학교에서 좋은 교육을 받는 대신 일찍부터 일터로 향했다. 네 살짜리 아이가 하루 16시간 구슬을 분류하거나 담배 마는 일을 하기도 했다. 심지어 아이들을 내다버리거나 살해하는 일도 비일비재했다.

당시 탁아소나 고아원은 한 편의 지옥도(地獄圖)를 연출했다. 아이들은 수면제나 마취약을 먹고 잠이 들었다. 당시 아이들에게 많이 먹이는 고드프리(Godfrey)라는 수면제는 '어머니의 조력자(mother's helper)'로 불렸다. 이런 상황에서 아이들의 사망률이 엄청나게 높은 것은 당연했다. 부정직한 업자들은 아이들에게 보험을 들었다가 그 아이가 죽으면 매장하지도 않고 돈을 타먹었는데, 이상하게도 보험에 들어있는 아이들이 더 잘 죽었다. 이런 보호소는 '매장 클럽(burial club)'이나 '천사제조기(angel maker)'라는 별명으로 불렸다.

유아 살해는 널리 퍼져 있는 관행이었다. 아이들을 다른 집에서 기를 수 있다고 말하는 당시 신문광고는 다시는 아이를 안 볼 수도 있다는 뜻을 넌지시 암시했다. 어머니 자신이 아이들을 죽이는 일도 적지 않았다. 극단적인 사례로 1734년에 런던의 두포어(Judith Dufour)라는 여인은 구빈원에 맡긴 자기 아이에게 새 옷이 지급된 것을 알자 아이를 도로 찾아와서 목 졸라 살해하고는 그 옷을 팔아 술을 사서 마셨다. 출산 직후에 아이를 바로 살해하는 영아살해도 흔했다. 특히 시골의 가난한 미혼 문맹 여성이 이런 범죄를 많이 저질렀다. 산채로 땅에 묻거나 목을 조르기도 했지만 입에 걸레조각이나 흙덩이를 집어넣어 질식사시키는 방법이 더 자주 사용되었다. 이런 범죄에 대해 엄격한 처벌이 규정되어 있지만, 판결은 대체로 너그러워서 사형이냐 무죄냐를 결정할 때 배심원들은 흔히 무죄를 선택했다. 사회가 아무런 도움을 주지 못하고 불쌍한 희생자에게 모든 책임을 떠넘기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온 것이 교회나 병원 입구에 몰래 아이를 놓고 가도록 만든 통이었다(불어로 '투르〈tour〉'라 한다). 21세기 대한민국에 '베이비 박스'라는 이름으로 그런 통이 다시 등장했다. 아이를 버리는 사람을 비난하기 전에 국가와 사회가 대책을 마련해야 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