겸재 정선 ‘계상정거도’ 배경
천원권 지폐 뒷면 그림 명당
서당 현판 글씨는 작고 아담
제자들 편하게 다가오게 배려
침실도 下人 자는 공간과 비슷
물아일체 충실 인간 차별 안 둬
가을이 짙어가며 산과 들이 울긋불긋해지니 도산서원에도 많은 탐방객이 찾아온다. 특히, 주말이면 자못 성시(成市)를 이뤄 10년째 이곳에 머무르고 있는 필자로서도 흐뭇한 마음이다. 그래서 지난해부터는 주말과 휴일에 서원과 수련원 관계자들이 합심해 해설 자원봉사에도 적극적으로 나서고 있다.
잘 알려진 대로, 도산서원은 약 450년 전 퇴계 이황 선생(1501∼1570)을 모시기 위해 창건된 서원이다. 서원(書院)은 조선 시대의 사립학교다. 국공립학교에 해당했던 성균관이나 향교와 달리, 올곧게 처신하며 사회를 이끌어갈 참선비를 육성할 목적으로 조용한 산림에 많이 설립됐다. 조선 후기 일부의 적폐로 말미암아 대원군에 의해 그 수가 대폭 줄었으나, 이후 다시 많이 복원돼 현재 전국적으로 600여 개소에 이른다고 한다. 이 가운데 대표적 서원인 도산서원에는 다른 서원에서는 좀처럼 볼 수 없는 몇 가지 특이점이 있다. 이참에 소개해 본다.
먼저, 입지부터 가히 명당이라 할 만하다. 뒤편 도산(陶山)에 포근히 안겨 탁 트인 낙동강을 바라보는 전형적인 배산임수(背山臨水)의 위치인데, 기암괴석이나 천길 단애(斷崖)와 같은 절경은 없지만, 찾는 이의 마음을 안온(安穩)하게 한다. 조선 시대 진경산수화의 대가인 겸재 정선(謙齋 鄭敾·1676∼1759)이 이 먼 곳까지 와서 ‘계상정거도(溪上靜居圖)’를 그린 사실이 이를 증명한다. 현행 천 원권 지폐 뒷면의 그림이 바로 그것이다. 탐방객들이 그 사실을 알게 되는 순간 그 유명한 그림의 현장에 자신이 서 있다는 것을 퍽 신기해한다.
서원 입구로 들어서면 퇴계 선생이 시대를 초월해 널리 존경받는 인물이란 사실을 확인할 수 있는 유적들과 마주하게 된다. 그중 하나는, 공자의 77대 종손인 공덕성(孔德成·1920∼2008) 선생이 1980년 도산서원을 방문하고 남긴 추로지향(鄒魯之鄕) 비석이다. ‘추로지향’이란 유학의 창도자인 공자와 맹자의 고향처럼 학문과 도덕이 높은 곳이란 뜻이다. 중국에서조차 희미해진 유학이 이곳 도산에서 살아 숨 쉬고 있음을 확인하고, 그 뿌리인 퇴계 선생에 대한 존모(尊慕)의 마음을 표현한 글귀다. 수년 전부터는 그의 손자인 79대 종손도 잇달아 도산서원을 방문해 대를 이어 존경을 표하고 있다.
서원 초입에서 만나게 되는 또 다른 유적이 있으니, 낙동강 건너편 언덕에 자리한 시사단(試士壇)이다. 시사단은 퇴계 선생 사후 200여 년이 흐른 1792년 정조 임금이 이곳에서 과거시험을 시행했던 것을 기념해 몇 해 뒤에 세운 비석이 있는 곳이다. ‘도산별시(陶山別試)’라 불리는 이 과거는 정조가 탕평책의 일환으로 영남 선비들에게 등용의 기회를 주기 위해 특별히 실시한 것이다. 그런데 과거시험 장소가 왜 도산서원이었을까? 몇백 년이 흘렀어도 존경받는 퇴계를 구심점으로 삼아 국가적 통합을 시도하려 했기 때문이다.
도산서원에서 얻을 수 있는 더욱 값진 경험은, 다른 서원들과 달리 모셔진 인물인 퇴계의 체취와 그 영향을 진하게 느낄 수 있는 성스러운 장소가 즐비하다는 사실이다. 대개의 서원은 모셔져 있는 인물의 연고지에 건립됐으나, 그가 직접 생활하던 유적은 그곳에서 거의 찾아볼 수가 없다. 이에 비해 도산서원은 중심인물인 퇴계 선생이 직접 설계하고 기거하고 공부하고 가르치던 공간을 당시 모습 그대로 보존하고 있다.
그 가운데 백미(白眉)인 도산서당은 마치 퇴계 선생의 숨소리까지 그대로 들리는 듯한 세 칸 규모의 조그마한 건물이다. 가히 검소와 청렴 그 자체라 할 만하다. 그뿐이랴! 서당 정면에 작은 나뭇조각에 새겨져 있는 ‘도산서당(陶山書堂)’이라는 퇴계의 친필 현판 또한 시선을 끌기에 충분하다. 선생은 경복궁 중수 때 전각 현판을 모두 쓸 정도의 필력이었다. 지금도 도산서원 경내에 걸려 있는 ‘광명실(光明室)’이란 현판이 이를 조용히 말해준다.
그런데 ‘도산서당’ 현판 글씨는 작고 아담할뿐더러 유머러스하기까지 하다. 왜 그럴까? 배우러 찾아오는 제자들이나 질문하기 위해 방문하는 후학들이 마음 편하게 다가오도록 배려한 결과다. 당시 퇴계 선생 같은 대학자를 찾아뵙는다는 것은 방문자 입장에서 무척 긴장되는 일이었을 것이다. 그렇게 되면 질문이나 대화가 제대로 이뤄지기 어렵다. 퇴계는 상대방의 이러한 처지까지 헤아렸던 것이다.
도산서당에는 사람들의 눈길을 붙잡는 것이 하나 또 있다. ‘완락재(玩樂齋)’라 불리는 작은 서재 옆에 붙어 있는, 겨우 한 사람 누울 정도의 아주 작은 공간이다. 이곳이 선생의 침실이라는 말을 들으면 사람들은 아주 의아해한다. 옆에 있는 하인이 잠자는 공간과 비교해도 별 차이가 없다는 점에서 더욱 그렇다. 이유가 뭘까?
선생은 책을 읽을 때 성현의 말씀을 듣는 듯이 했다. 그러니 성현을 상징하는 책이 있는 서재에서 다리를 뻗고 누울 수가 있었겠는가? 여기에는, 선생 자신과 하인은 신분과 역할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육신의 크기는 비슷한데 구태여 눕는 공간에 차등을 둘 필요가 있겠느냐는 생각도 함께 스며 있다. 나와 대상을 하나로 보는 유학의 물아일체(物我一體)의 이념에 충실해 모든 인간에 대해 차별과 차등은 되도록 두지 않으려 했던 것이다. 선생이 오늘까지도 겨레의 큰 스승으로 존경받는 이유 중 하나다.
이 바람 맑고 선선한 가을날, 이렇듯 인간 존중과 배려의 향기(香氣)가 가득한 도산으로 가족이나 지인들과 함께 찾아와 해설을 들으며 푹 한 번 빠져보기를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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