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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정의롭다" 외치는 사람들이 만드는 지옥

바람아님 2018. 11. 19. 08:37

(조선일보 2018.11.17 김태훈 출판전문기자)


자기만 옳다는 믿음 가진 시대… 정의의 '가면'을 쓴 것에 불과
분풀이성 감정 배설에 악용도


정의를 밀어붙이는 사람

에노모토 히로아키 지음|정지영 옮김|샘앤파커스|264쪽|1만4800원


이수역 폭행사건 가해자 처벌을 요구하는 청와대 국민청원이 30만명을 넘어설 때까지만 해도

들끓는 분노는 정의로워 보였다.

그런데 여성 측이 남자들 신체 부위를 거론하며 욕설하는 동영상이 공개되면서 분노는

방향을 잃었다.

개인 소셜미디어에 남자들의 폭력 행위를 비난하는 글을 썼던 한 여성 연예인은 뒤늦게

"사실 관계가 명확히 파악되지 않은 상황에서 경솔하게 글을 올렸다"며 사과했다.

그러자 이번엔 여성 측에서 자신들이 맞았다며 또 다른 동영상을 공개했다. 정의의 몽둥이를

들고 있던 누리꾼들은 갈팡질팡했다. 이 몽둥이로 누구를 내리쳐야 하는가.


일본의 저명한 심리학자인 저자는 '그 몽둥이로 누구를 때려야 하는가'에 관심을 두지 않는다.

그가 주목하는 것은 몽둥이를 든, 자칭 '정의로운 시민'들이다.

저자는 묻는다. "당신은 왜 몽둥이를 들었는가?"

그의 안내를 따라가다 보면 정의로운 인간은 어느새 사라진다.

대신 나타나는 것은 내 안에 숨어 있던, 비겁하고 음흉하며 기회주의적이고 무책임한 괴물이다.


이수역 사건에서 분명한 것은 '우리가 그곳에서 일어난 사건 실체를 모른다'는 사실이다.

그런데도 30만명이 국민청원 사이트에 몰려들었다. "알지도 못하는 사람과 실체를 모르는 사건인데도

비난하는 것이 인터넷 시대의 보편적 현상"이라고 저자는 진단한다.

왜 인터넷에선 자신이 생각하는 정의를 거리낌 없이 주장하고 더 대담하게 타인을 정죄하는가.

저자는 미국의 한 심리학자가 행한 실험 결과를 소개한다.

심리학자가 어떤 이에게 문제를 풀게 했다. 실험 참가자들은 그가 오답을 내면 벌로 전기충격을 가할 수 있다.

참가자들은 둘로 나뉘어 A그룹은 얼굴을 공개하고 B그룹은 얼굴을 가렸다.

그 결과, 얼굴을 가린 쪽이 얼굴을 드러낸 쪽보다 오답자에게 전기충격을 가한 횟수가 두 배 더 많았다.

여기엔 두 가지 심리적 요인이 작용한다.

오답자를 벌하는 게 정당하다는 정의감, 나를 알아보지 못한다는 익명성이다.


'나는 정의롭다'고 생각하는 많은 이가 실은 정의의 가면을 쓴 것에 불과하다고 저자는 지적한다.

가면 뒤에는 선망이나 시샘이 감춰져 있거나 "나는 남을 징벌할 수 있다"는 그릇된 우월감이 숨어 있다.

때론 일이 풀리지 않을 때 분풀이로 감정을 배설하는 핑계도 된다.

잘못한 사람을 단죄하고 스트레스도 푸니 일거양득. 물론 아무나 공격하지는 않는다.

공격의 대상은 잘못을 저지른 인물이나 조직이어야 한다. 그래야 남을 비난하는 자신이 도덕적으로 떳떳해진다.

버릇이 되면 강도를 높이다가 마침내 하이에나처럼 달려들어 죽을힘을 다해 물어뜯으며 해방감을 만끽하는 단계에 이른다.

저자는 "이런 이들은 자신이 올바른 일을 하기 위해 남을 비난한다고 믿기 때문에 더 위험하다"고 말한다.


인터넷의 가면 뒤에서 인간은 더 대담하게 정의를 주장하고 타인을 비난한다.
인터넷의 가면 뒤에서 인간은 더 대담하게 정의를 주장하고 타인을 비난한다. /게티이미지코리아


정의가 휘두르는 폭력을 인식하더라도 벗어나기는 쉽지 않다. 이는 '나와 다른 관점을 상상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저자는 '인지 복잡성 부족'이라는 용어로 설명한다. 인지 복잡성이 부족한 사람들은 '절대'라는 말을 입에 달고 다닌다.

'나는 옳다'는 믿음 때문에 사소한 차이에도 분노하고 남과 대립한다.

상대에게서 마음에 들지 않는 점을 발견하면, 그것을 개성으로 인정하지 않고

"너 그런 사람인 줄 몰랐다"며 마음을 닫아건다.

억측을 잘하는 것도 전형적인 특성이다.


저자는 대부분의 인간사에서 누가 옳은지 따지는 건 무의미하다고 지적한다.

저마다 다른 성격을 갖고 태어나기 때문이다.

사람은 이론형·권력형·경제형·사회형·심미형·종교형 등 6가지 유형으로 나뉘는데,

권력형 인간은 남을 쥐고 조종하지만 사회형 인간은 친목과 화합을 지향한다.

두 유형은 서로를 결코 이해하지 못한다.

충돌하지 않으려면 그냥 "너와 나는 다르다"고 인정하는 수밖에 없다.


저자는 각자의 내면에 도사린 정의감이 얼마나 부당하고 위험한지 지적하면서도, 이를 오로지 개인의 윤리 문제로

치부해선 안 된다고 강조한다. 뻔뻔하고 정직하지 못한 정치인이나 탐욕스러운 기업인을 보며 사회는 집단적인 울분과 좌절

상태에 빠진다. 정치·사회 지도층의 불의를 목도할 때마다 쌓인 분노가 적당한 공격 대상을 만나면 정의라는 이름으로

폭발하듯 분출한다. 우리가 매일 목격하고 있는 그대로다.





블로그내 같이 읽을 거리 :


[다시 읽는 명저] "이념에 갇힌 권력이 민주주의 위기 가속"   (한국경제 2018.11.01)
움베르토 에코 《민주주의가 어떻게 민주주의를 해치는가》 
http://blog.daum.net/jeongsimkim/33594 


"나는 정의롭다" 외치는 사람들이 만드는 지옥  (조선일보 2018.11.17)
자기만 옳다는 믿음 가진 시대… 정의의 '가면'을 쓴 것에 불과
분풀이성 감정 배설에 악용도
정의를 밀어붙이는 사람|에노모토 히로아키 지음|정지영 옮김|샘앤파커스|264쪽|1만4800원
http://blog.daum.net/jeongsimkim/33653 


우리가 믿는 진실은 아흔아홉 개의 얼굴을 갖고 있다   (조선일보 2018.11.24)
사회 곳곳서 '팩트'란 이름으로 자신의 목적에 맞게 진실을 편집
무엇이 진짜인지 밝히기보다 어떤 진실 택할 것인지 고민해야
만들어진 진실|헥터 맥도널드 지음|이지연 옮김|흐름출판|416쪽|1만6000원
http://blog.daum.net/jeongsimkim/33734


[서평] 파시즘 A WARNING  (매일신문 2018-11-21)

파시즘/ 매들린 올브라이트 지음/ 타일러 라쉬·김정호 옮김/ 인간희극/ 336쪽/ 1만8000원
http://blog.daum.net/jeongsimkim/3376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