人文,社會科學/自然과 動.植物

산수국 [이굴기의 꽃산 꽃글]

바람아님 2018. 11. 27. 08:54
경향신문 2018.11.26. 20:56


눈이 왔다. 나도 그렇지만 공중에 붕 떠서 사는 이들이 많은가 보다. 여기저기 눈에 띄는 첫눈 기념사진이 모두 위에서 아래로 찍은 것들이다. 길을 걸으면 눈밭에 찍히는 발자국들. 이렇게 띄엄띄엄 걷기에 그런 것일까. 지금까지 연속적으로 살았는데 그렇게 축적된 기억이 도무지 없다. 빛은 파동과 입자의 성질을 동시에 가진다고 한다. 먼지들의 집적인 이 몸도 빛의 자식이라서 그런 이중성을 고스란히 실천하는 중이라 여기기로 했다.


며칠 전 북한산성에서 의상능선 가는 길. 서울 쪽에서는 더러 올랐지만 바깥에서 접근하기는 드문 경험이다. 북한산이 그저 하나의 우뚝한 산이 아니란 것을 증명하듯 바위가 여러 골짜기로 대단하게 뻗었다. 평소 쓰지 않던 근육과 체위를 동원하며 기신기신 올라서 사모바위에 도착했다. 길은 고요하고 바위는 조용했다. 팥배나무 열매가 주렁주렁하다. 덕분에 새들은 아무 걱정 없이 지저귄다. 빨간 열매 너머로 보이는 서울은 첩첩산중에 파묻힌 고도(古都)같다.


빛이 일찍 스러지는 계절이기에 꽃 대신 말을 배우기로 했다. 산성을 복원하는 작업 현장에 낯선 용어들이 많다. 여장, 성가퀴, 성랑. 여장은 성에 낮게 덧쌓은 담인데 여자들도 넘을 수 있기에 ‘女牆’으로 표기한단다. 오랜만에 만난 사모바위. 예전에 보았을 때와 그 느낌이 퍽 다르다. 이목구비를 모두 버린 편안한 얼굴이다. 말의 바깥을 터득한 홀가분한 표정이다. 삼천사로 내려오는 능선. 오후 5시 무렵의 삐딱한 햇살을 등에 업자 익숙한 그림자가 건너 증취봉 한 자락에 척 걸쳐졌다. 빛의 속도로 이 우주로 먼저 도망치다가 바위한테 꼼짝없이 붙잡힌 그림자, 나의 겉가죽!


그래도 꽃 하나를 빠트릴 수는 없다. 꽃이 아니면서 바람결에 꽂힌 꽃이다. 삼천사 입구 미타교에서 만난 산수국이다. 빛이 머물다간 꽃은 변화가 많다. 본래의 꽃은 그 주위로 곤충을 유인하는 헛꽃이 만발했었다. 이제 그 소임을 다한 헛것은 방향을 빙그르르 돌려 아래를 향하고 있다. 꽃은 색깔만 빠졌을 뿐, 공중에서 풍장하면서도 어제의 골격을 악착같이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 어디로 가시려는가, 산수국. 수국과의 낙엽관목.


이굴기 | 궁리출판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