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비즈 2018.11.17. 05:00
올해처럼 극적인 가을이 또 있었던가요? 마음의 준비도 되지 않았는데 이렇게 확 와버리면 어쩌라는 건지 당황스럽기만 합니다. 가을은 모름지기 이상(李箱)의 수필 산촌여정(山村餘情)의 한 구절처럼 ‘가을이 올 터인데 와도 좋으냐고 쏘곤쏘곤하지 않습니까?’ 하다가 와야 제 맛인데⋯.
이제는 그렇게 오는 가을을 맞이하기가 어려워졌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지구온난화 때문에 말입니다. 추파(秋波)를 던지며 올 듯 말 듯하다가 품에 안기던 그 옛날의 가을이 그립습니다.
어느 날 갑자기, 무턱대고, 그냥, 불과 며칠 새에 찾아온 올해 단풍이 나쁘다는 건 아닙니다. 오히려 생애 최고의 단풍이지 싶을 정도로 색감이 너무나도 화려해서 놀랍습니다. 붉은 단풍은 물론이고 노란 단풍이나 갈색 단풍까지도 아름답게 물들었습니다.
어쩌려고 이러나 싶을 정도로 삽시간에 울긋불긋한 색으로 치장한 모습이 변심한 애인의 호사스런 파티복처럼 전에 본 적 없이 화려합니다.
그런데 이건 또 무슨 조화일까요? 가을이 하루가 다르게 깊어지는가 싶더니 불과 1주일 사이에 나뭇잎이 하나둘씩 떨어져버립니다. 단풍이 시작된 지 얼마나 됐다고 벌써 낙엽이라니⋯.
시댁에 온 며느리도 이렇게 빨리 가지는 않을 것입니다. 두어 달 정도는 눌러앉아 있어야지 이거 너무 빨리 가는 것 아니냐는 투정을 부리게 됩니다. 그 소리를 듣기라도 했는지 날이 다시 따뜻해지면서 가을이 잠시나마 자신의 퇴장을 유예한 느낌입니다.
고맙긴 하나 한반도에서 봄과 가을이 점점 짧아진다는 사실을 체험하는 것 같아 마냥 좋지만은 않습니다. 만날 때처럼 이별하는 것도 마음의 준비가 필요한 일인데 이대로 보내기에는 너무 아쉬운 가을인지라 이렇게 글로라도 몇 자 적어봅니다.
단풍과 낙엽은 겨울로 가는 길목에 선 낙엽수들이 겪어야 하는 통과의례입니다. 단풍은 나무들이 스스로 원해서라기보다 낙엽을 만들기 위한 전초전 성격이 강합니다. 엽록소가 파괴되면서 푸른빛을 잃어가는 대신 노란색이나 갈색 색소가 드러나 보이기도 하고, 안토시아닌이 합성되어 붉은색 색소를 만들어내기도 하는 것이 단풍입니다.
단풍이라면 뭐니 뭐니 해도 붉은 단풍이 최고입니다. 이름에 단풍이 들어가는 나무들을 포함하는 단풍나무과의 나무들이 가을산을 붉혀주는 주역입니다. 단풍나무과 나무 중에서도 복자기, 복장나무, 단풍나무, 당단풍나무, 신나무 등이 가장 붉은 채색을 담당합니다.
자생종은 아니지만 중국단풍, 은단풍, 꽃단풍도 길가나 정원에서 붉은 색칠을 해댑니다.
그들에게 최고의 단풍 라이벌은 붉나무가 속한 옻나무과 나무와 화살나무가 속한 노박덩굴과 나무입니다. 붉나무는 이름부터가 단풍의 붉은색을 나타냅니다. 붉나무 외에 옻나무, 개옻나무, 산검양옻나무가 대표적입니다. 잎이나 줄기를 자르면 유액이 나오는 이들은 몸속의 유액이 단풍의 붉은색으로 나타나는가 봅니다.
노박덩굴과 식물 중에서는 화살나무의 단풍이 가장 아름답습니다. 몸속에 유액이 없는 이들은 어떤 원리로 붉은 단풍을 내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밖에 대극과의 사람주나무나 포도과의 담쟁이덩굴 정도가 붉은 단풍을 잘 만들어내는 편입니다. 사람주나무는 자르면 하얀 액이 나오고 담쟁이덩굴은 그렇지 않은데도 붉은 단풍이 곱게 잘 드는 편입니다. 다른 나무들도 그렇지만 이들 역시 햇빛이 잘 드는 곳에 서 있을수록 타는 듯한 붉은 단풍을 만들어냅니다.
낙엽은 일종의 회수권입니다. 더는 기능하지 못하는 잎을 그냥 두기보다는 제 발밑으로 떨어뜨려 남은 영양분이라도 거두어들이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기 위해 낙엽수들은 날이 추워지면 잎자루가 줄기와 붙는 쪽에 떨켜라는 분리층 조직을 만들어 더 이상의 영양 공급을 중단한 채 미련 없이 잎을 떨구어 버립니다.
미련이 남아서인지 묵은 잎을 떨궈버리지 못하는 나무가 있는데, 그 대표적인 예가 감태나무입니다. 이들은 겨울 지나 봄까지도 갈색의 묵은 잎을 그대로 달고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래서 감태나무는 겨울에 더 잘 보입니다.
참나무 종류들도 떨켜가 제대로 형성되지 않으면 잎을 오래도록 매달고 있기 일쑤입니다. 그건 다른 나무들도 마찬가지여서 생강나무 같은 것이 겨울 지나 봄까지도 잎이 붙어 있는 것을 본 적이 있습니다. 물론 올해는 벌써 낙엽되어 떨어져버렸지만 말입니다.
노란 단풍은 물론이고 갈색 단풍마저 예뻐 보이는 올 가을을 이대로 보내야 하는 상황이 참 아쉽습니다. 가을이 이렇게 서둘러 가는 것을 보면 올 겨울은 좀 더 두꺼운 외투가 필요할 것 같습니다. 여우목도리가 됐든 늑대가죽장갑이 됐든 하나쯤은 갖고 있어야 서럽지 않을 계절이 이제 저 멀리 오고 있는 것입니다.
이동혁 풀꽃나무칼럼니스트
'人文,社會科學 > 自然과 動.植物' 카테고리의 다른 글
산수국 [이굴기의 꽃산 꽃글] (0) | 2018.11.27 |
---|---|
[핑크 열풍] ① '여기도, 저기도' 한반도 뒤덮은 핑크뮬리/② 신비로운 분위기…근데, 왠지 낯설다/③ 이렇게 막 심어도 되나…엄연한 외래종(끝) (0) | 2018.11.22 |
이 사람이 있어야 우포늪 그림이 완성된다 (0) | 2018.11.15 |
단 2마리 남은 북부흰코뿔소, 멸종 막을 방법 찾았다 (연구) (0) | 2018.11.10 |
[3분과학] 죽음 향한 '시속 830m', 단풍은 왜 아름다울까 (0) | 2018.11.0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