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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잔틴 정치의 실패가 십자군을 불렀다

바람아님 2019. 1. 5. 19:52

(조선일보 2019.01.05 김태훈 출판전문기자)


"십자군 전쟁 부른 진짜 배후는 교황 아닌 동로마 제국의 황제
튀르크와의 가짜 평화 추구하다 궁지 몰리자 서방에 손 내밀어"


'동방의 부름'동방의 부름

피터 프랭코판 지음|이종인 옮김|책과함께|420쪽|2만2000원


1095년 11월 27일 프랑스 중부 도시 클레르몽에 나타난 교황 우르바누스 2세는 세계사에

영원히 기록될 연설을 시작했다.

"사기꾼과 병자여도 상관없다. 모두 그리스도의 병사가 되어 성지 예루살렘을 이교도의

손에서 구해내자. 이것은 구원을 받는 새로운 방식이다."

유럽 전역에서 약 7만~8만명이 교황의 호소에 응해 칼을 든 순례에 나섰다.

제1차 십자군 원정이었다. 이 군사행동의 배경을 두고 다양한 해석이 존재한다.

교황 권력의 부상, 기독교와 이슬람의 대결이란 뻔한 설명에서부터 억압된 성적(性的) 긴장을

풀 출구를 찾아 예루살렘으로 향했다는 정신분석학적 견해, 전쟁이 가져온 특수로 GDP가

증가했다는 경제사적 분석 등이 더해졌다.


옥스퍼드 대학 비잔티움 연구센터장인 저자는 또 다른 흥미로운 관점을 제시한다.

그는 이 책에서 십자군 원정이 국가의 존망을 건 정치·외교전의 산물이며, 십자군의 동방행을 촉진한 주인공은

교황이 아니라 비잔틴(동로마) 제국의 황제 알렉시오스 1세 콤네노스라고 주장한다.

튀르크 군벌들에 의해 수도 콘스탄티노플을 제외한 거의 모든 땅을 잃고 괴멸 위기에 몰린 알렉시오스는

서방을 끌어들일 방법을 고심하다가 '이교도의 땅'이 되어버린 예루살렘을 떠올렸다.

저자는 특히 성지(聖地) 회복을 미끼로 서방 군사력을 불러들이기 위해 그가 펼친 치밀한 외교전을 주목한다.


황제는 유럽인들 사이에서 성물(聖物)에 대한 관심이 높아진 분위기까지 십분 활용했다.

유럽 영주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그는 "콘스탄티노플이 함락되면 그곳에 소장된 성물이 약탈당하거나 훼손될 것"이라

경고하며 제국이 소장한 성물 목록을 빼곡히 적었다. 예수를 때린 채찍과 그가 채찍질당할 때 묶였던 기둥,

그리스도가 입었던 보라색 겉옷과 가시 면류관, 그가 못 박혔던 거룩한 십자가, '오병이어'의 기적을 담았던

광주리 12개 등의 목록을 본 유럽인들은 안달했다. 알렉시오스가 의도한 대로였다.



십자군 원정을 촉구하는 교황 우르바누스 2세를 그린 프란체스코 아예스의 유화. 오른쪽 사진은 교황에게

십자군 파견을 부탁한 동로마 황제 알렉시오스 1세를 새긴 모자이크. /게티이미지코리아·위키피디아


교황은 알렉시오스가 절망적으로 던진 미끼를 물었다. 순진해서 그랬던 것은 아니다.

신성로마제국 황제 하인리히 4세가 세운 또 한 명의 교황 클레멘트 3세와 정통성 싸움을 벌이던 그는 동로마 황제의

구원 요청을 자기 기반 강화에 활용했다. 하인리히와는 정치적 운명을 함께할 수 없었던 세속 정치가들이 여기에 합류했다.

왕위 승계에 불안을 느낀 세자 콘라드가 가세했고, 신성로마제국의 이탈리아 내정 간섭에 반발해 온 토호들도 동참했다.


콘스탄티노플에 집결한 십자군이 이후 니케아, 안티오크, 예루살렘에서 잇따라 펼친 공성전은

카이사르의 갈리아 전기만큼이나 흥미진진하다. 니케아 공방전이 시작되자 알렉시오스 황제는 십자군이 이 도시를 먼저

점령하는 불상사를 막기 위해 성 안의 튀르크족을 매수해 자기에게 항복하도록 공작을 벌인다.

보급이 바닥난 십자군이 성 베드로의 초대 교구였던 안티오크를 되찾기 위해 쏟아내는 종교적 열정은 숭고하고도 무섭다.

그들은 전사한 동료의 시신을 먹어가며 반년 넘게 성을 포위 공격한 끝에 마침내 항복을 받아냈다.


동어반복이 역사의 본질임을 새삼 일깨우는 대목도 여럿이다. 군인이 아니면서도 오로지 종교적 열정으로 뭉친

이른바 '민중 십자군'은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에 유대인 집단 학살을 저지른다. 그들의 일탈은 지난 세기 세계 곳곳에서

벌어진 제노사이드 범죄, 또는 문혁에 휩쓸려 중국을 암흑으로 몰아넣은 홍위병의 광기를 떠올리게 한다.


알렉시오스 통치가 불러온 뚜렷한 명암은 '정치 지도자의 자질'을 곱씹게 한다.

1081년 25세에 쿠데타로 집권한 황제는 검소했고 밤마다 성경을 읽었으며 누구와도 만나 대화하는 열린 소통으로

10년간 정치적 안정을 구가했다. 하지만 그는 도발하는 튀르크 군벌들에 뇌물을 주거나 조공을 바치며 평화를 구걸하는

실수를 저질렀다. 그들과 맺은 평화 동맹은 페체네그족이 군사행동을 시작하다 곳곳에서 와해되며 사상누각임이었음이

드러났다. 외환(外患)은 제국 내부에서 잇단 반란을 불렀다. 어이없게도 반란 세력마다 튀르크 용병을 끌어들였다. 비잔티움

사람들은 외부의 적보다 내부의 정적을 더 증오했다. 1000년 전의 역사이지만 오늘 우리가 처한 현실을 돌아보게 한다.